5월 중순이 넘어서면, 이제는 확연히 더워지는 계절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이 더워진다는 것은 내게는 봄 학기가 마무리되고 학생들은 졸업하거나 여름방학이 되어 캠퍼스를 떠난다는 말이다. 지난 일 년간의 수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학생들의 기말 페이퍼와 수업과 관련해서 남긴 메모를 다시 읽어본다. 미국에서 한국 대중문화와 영화 수업을 가르치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는 아시아계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던 수업 풍경이 어느새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의 학생들로 채워지면서 학기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늘어나는 새로운 관심과 열정이다.
혹자들은 펜데믹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펜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은 강제로 집에 있게 되었고, 온라인으로 업무와 수업을 진행해야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 컨텐츠 소비 또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플랫폼 시장의 거대 성장은 한국 미디어 컨텐츠의 세계화에 화력을 제공해준 셈이다.
한류의 시작도 어찌보면 펜데믹과 같이 전세계적인 큰 위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와 유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97년 소위 말하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경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한국은 미디어 컨텐츠 수출이라는 경제 위기 극복 돌파구를 찾으면서, 세계화 트렌드에 합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1991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방영된 MBC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1997년 중국 중앙 텔레비전에서 소개되었는데, 당시에 한국 드라마가 다른 문화권에 소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해, “사랑이 뭐길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시청률이 가장 높은 드라마로 기록되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중국와 홍콩, 그리고 다른 동남아시아의 나라들도 한국 드라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일본 미디어 컨텐츠가 아시아 내에서는 거의 독점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아시아 상당 지역에 불어닥친 경제 위기로 인해 결국 좀더 저렴하면서도 유사한 내용의 컨텐츠를 가진 대체 프로그램을 찾던 미디어 매체들에게 “사랑이 뭐길래” 의 중국 내에서의 큰 인기는 한국 드라마라는 새로운 컨텐츠에 눈실을 쏟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 여기는 문화 풍토는 유교 사상을 공유하는 아시아 문화권 내에서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소재였기에, 정부 입장에서는 한국 드라마는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수출 효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되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가는 관심과 인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국가와 지역을 넘나드는 온라인 플랫폼의 거대시장과 정부의 적극적인 관여만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의 글로벌 인기에 대해 미디어 학자들은 흔히 소프트 파워 (Soft Power)의 한 사례로 설명하곤 한다. 소프트 파워는 하버드 대학교의 석좌교수인 조지프 나이 (Joseph S. Nye)가 2004년 발표한 개념으로 돈이나 군사 권력과 같이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하드 파워 (Hard Power)와는 상이한 개념으로 비강제적이면서 강요가 아닌 문화나 예술을 통해 매력에 어필하는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하도록 하는 힘’ 으로 정의된다. 소프트 파워의 사례로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나 이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애니메이션과도 같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한국 미디어 컨텐츠의 인기와 반응은 미국, 일본과는 다른 맥락에서 탄생했고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프트 파워의 사례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은가.
이번 봄학기 한국 대중문화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토론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스위트 파워(Sweet Power)라고 하는 개념을 새로 소개했다. 미디어 학자인 빈센조 시첼리(Vincenzo Cicchelli)와 실비 악토버(Sylvie Octobre)가 작년 온라인으로 출간한 그들의 저서인 “소프트 파워에서부터 스위트 파워까지 (From Soft Power to Sweet Power)”에서 한류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소프트 파워(Soft Power) 보다는 스위트 파워(Sweet Power)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시첼리와 악토버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의 애니메 시장 혹은 카와이 (귀여운) 문화 또한 소프트 파워로 설명이 되지만, 한국 문화 컨텐츠는 이들 문화 현상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꼬집어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과는 다른 한국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로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나라도 먼저 침범하지 않고 식민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이 어떻게 매력이 될 수 있을까 하며 의아해할 수 있지만, 한류의 붐이 먼저 일어난 나라들과 지역을 곱씹어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중국,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식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한류는 하드 파워나 소프트 파워와는 달리, 아픔을 공유하고 또 그 아픔의 역사를 뛰어넘어 문화적으로 공감을 이루면서 위협적이지 않은 힘을 보여주는 스위트 파워로 재정의해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공유와 공감이다. 한국 대중문화 수업을 처음 개설하고 가르쳤을 때의 학생들이 썼던 기말 페이퍼가 생각난다. 몇몇 학생들은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온 이민 2세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처음 낯설고 두려운 환경 속에서 BTS의 노랫말을 들으면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이겨서 상대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 서로 공유하고 공감하는 ‘우리’라는 새로운 커뮤너티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한국 미디어 컨텐츠의 세계화는 새로운 ‘우리’이면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의 방향이기도 하다.
박자현 교수
코넬 대학교 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 미디어, 영화로 박사 학위를 수령하였으며, 현재 인디애나 대학교 객원 조교수로서 한국문학, 대중문화, 영화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코넬대학교 동아시아 시리즈 출판부와 계약 중인 웹툰과 뉴미디어 수용 및 젠더 담론 연구를 주제로 하는 책을 집필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