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1세가 후세에게 전하는 응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은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이다. 국가 주의와 민족주체성 함양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헌장은 1994년 교과서에서 삭제되며 사실상 폐지될 때까지, 당시 학생들이 반드시 외워야 했던 시대의 유산이었다.
필자가 여섯 살 남짓 되었을 무렵이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형들과 누나들이 방학 때 강원도 시골집에 내려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워 가는 것이 숙제”라며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그 소리를 귀동냥으로 듣다가 어느새 전문을 외우게 되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는 “신동이 났다”며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자랑삼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네 자랑 투어를 다녔다. 지금 생각 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 내 입에서 흘러 나오던 문장 중 하나가 바로 “밖으로 인류공영 에 이바지할 때다”였다.
학교에 들어가고 조금 더 자란 뒤, 나는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인류공영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나 내 나라만 잘되는 데 그치지 않고, 온 인류가 함께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되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알고 난 뒤 나는 오히려 기가 막혔다. 가까스로 보릿고개를 넘긴 나라가 어린아이들에게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꿈을 꾸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러나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허황되어 보이던 말이 현실로 바뀌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대한민국은 가난한 원조 수혜국에서 개발 도상국의 모델이 되었다. 전쟁과 가난을 겪은 나라였지만, 교육과 산업화, 수출, 기술개발을 통해 고소득 국가로 성장했다. 세계은행은 한국을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며, 인적자본과 혁신, 녹색성장 투자가 포용적 발전을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 모델로 평가한다.
이 경험은 단순히 한국만 잘살게 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개발도상국이 “우리도 한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한국은 자신의 경험을 개발협력과 정책자문 형태로 다른 나라들과 나누고 있다.
한국은 과거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던 나라 였지만, 2000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 수원국 명단에서 졸업했고, 2010년에는 OECD 개발원조위원회, 즉 DAC 회원국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공적개발원조, ODA는 보건, 교육, 농업, 물과 위생, 디지털 행정, 직업훈련, 인프라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국국제 협력단 KOICA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과 복지 증진을 위해 무상원조 사업을 수행하는 대표 기관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한국은 저소득 국가의 백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국제 백신 협력체 COVAX에 기여했다. 한국 정부는 2021년 Gavi COVAX AMC에 2억 달러 지원을 발표 했는데, 이는 92개 저·중소득 국가의 백신 조달 을 돕기 위한 재원이었다. 한국의 참여는 “우리만 안전하면 된다”가 아니라 “가난한 나라까지 함께 안전해야 팬데믹을 끝낼 수 있다”는 인류공영의 정신을 보여준 사례였다.
한국은 유엔 평화유지활동에도 참여해 분쟁 지역의 안정과 재건을 돕고 있다. 한국 평화 유지요원들은 여러 유엔 임무에 배치돼 활동 하고 있으며, 한국은 유엔 평화유지 예산 분담 에서도 주요 기여국에 포함된다. 이는 한국이 단지 경제력만 키운 것이 아니라 국제 평화 질서 유지에도 책임을 나누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환경보호를 함께 추구하는 녹색성장 개념을 국제사회에 확산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서울에 본부를 둔 글로벌녹색성장 기구, GGGI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이 저탄소· 포용적·지속가능한 경제 모델로 전환하도록 지원하는 국제기구다. 한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이제는 기후위기 시대의 지속가능 한 발전 모델로 바꾸어 나누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 반도체, 스마트폰, 자동차, 배터리, 조선, 디스플레이, 가전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공급망의 중요한 축이 됐다. 한국 기업들이 만든 메모리 반도체, 스마트폰, 전기차 배터리, 선박, 의료·전자기기는 세계인의 생활과 산업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것도 인류공영의 한 형태다. 기술은 단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빠른 통신, 더 안전한 이동, 더 효율 적인 에너지 사용, 더 나은 의료와 교육 접근성 을 가능하게 한다.
대한민국은 군사독재와 권위주의를 겪었지만,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선거, 언론, 시민사회, 사법제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화했다. 이 경험은 많은 나라에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가난했던 나라, 전쟁을 겪은 나라, 권위주의를 겪은 나라도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교육을 통해 국가를 일으킨 대표적 사례 이기도 하다. 부모 세대의 희생, 높은 교육열, 기술인력 양성, 대학과 연구기관의 성장, 직업 교육과 과학기술 투자가 국가 발전의 핵심 기반이 됐다.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한국의 사례는 “자원이 부족해도 사람을 키우면 나라가 바뀔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한국은 지진, 태풍, 전쟁, 난민 위기, 감염병 등 국제 재난 상황에서도 긴급구호대와 구호물자, 의료 지원, 재건 지원을 제공해 왔다. 과거 도움을 받던 나라가 이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돕는 위치가 된 것이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어려운 나라에 다시 손을 내미는 일이야말로 인류공영의 실천이다.
K-pop, 드라마, 영화, 웹툰, 음식, 뷰티, 문학 등 한류 역시 세계인들이 한국을 더 친근하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문화는 총과 돈으로 만드는 영향력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힘이다. 한국 문화는 세계 젊은 세대에게 언어와 국경을 넘어선 공감, 창의성, 다양성의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60년 동안 원조를 받던 나라 에서 원조를 나누는 나라로,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경제와 문화, 기술, 평화협력에 기여하는 나라로 변모했다. 한국의 성장은 한 나라의 성공담을 넘어, 인류가 함께 번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결국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자”는 그 허황되어 보이던 말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시간의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 주어야 할까.
지난해 미시간 한국학교 학생들이 모인 한국의 날 행사에 취재차 참석한 적이 있다. 기념식이 시작되자 어림잡아 2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애국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한국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국가를 잊지 않고 불러 주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이어진 순서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 다. 미국 국가를 부를 차례가 되자, 많은 학생 들이 입을 다물었다. 거의 아무도 따라 부르지 못했다. 그 아이들 중 몇 명이 한국으로 돌아 가고, 몇 명이 미국에 남아 살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미국 국가를 모른다는 사실은 쉽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한인사회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을 내 나라로 만들 겠다는 생각,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심어 주지 못한 선배들의 잘못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잠시 내려놓았다. 미시간의 우리 아이들을 위해 네트워크 프로그램과 인턴십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를 내 나라로 만들기 위해 거침없고 당돌한 미래를 준비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프로 그램이 무슨 소용일까 하는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 11일, 미시간 대한체육회가 디트로 이트 한인감리교회와 함께 마련한 북중미 월드컵 단체 응원전에서 나는 다시 희망을 보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보였다. 어른들이 아이들이 잘 놀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얼마든지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환호하고, 포옹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생각했다. 이 아이들을 정말 잘 키워 나가야겠다고. 우리 1세들이 이 나라에서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많은 경험들을 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한국계로서의 자존감을 심어주고 싶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만이 아니다. 너희 뒤에는 언제나 너희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한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이민 1세들은 지난 세월 참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낯선 땅에서 생존해야 했고, 때로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길을 찾아야 했다. 세상의 주인으로 서기보다는 큰 힘에 기대어 살아남아야 했고, 때로는 마음속 자존심을 접은 채 비굴한 선택을 해야 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후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변방의 아이들이 아니다. 한인 1세들이 땀과 눈물로 일군 터전 위에서 자란 아이들이며, 세계 속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아이들이 단순한 성공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며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사회, 1등 국가의 품격을 잃어가는 미국 사회를 넘어, 인류 공동의 선과 평화에 기여하는 큰 인물들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을 품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한국계라는 정체성을 자부심으로 삼아 세계 무대에서 빛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돌아보았을 때, 자신들의 뒤에는 언제나 묵묵히 응원하고 기도해 준 한인 커뮤니티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을 함께 길러낸 독립투사들만큼 훌륭한 미시간의 어른들에게 진심의 박수를 미리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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