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미국 이민 소년에서 미시간대 졸업생, 독립운동가, 국민기업 창업자로

[주간미시간=김택용 기자] 광복 81주년을 맞아 미시간 한인들이 기억해야 할 인물 가운데 또 한 사람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제약기업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박사다.
많은 사람들은 유일한을 성공한 기업인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교육자였으며 사회사업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미시간 한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 졸업생이었다.
미시간대 동문회는 유일한을 1919년 졸업생으로 소개하면서, 그가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교육 발전을 위해 여러 사업과 재단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홉 살 소년이 홀로 미국으로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4년, 불과 9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유한대학교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는 미국에서 고학하며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시간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남가주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고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국제법도 공부했다.
오늘날에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낯선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1900년대 초 미국이었다. 인종차별과 언어 장벽이 존재했고 한국이라는 나라조차 미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고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은 특별하다. 하지만 유일한의 이야기가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미국에서 성공할 기회를 얻은 뒤에도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데 있다.
미시간대 학생에서 독립운동가로
1919년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3·1운동이 일어났고 세계 각지의 한인들도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유일한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해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설명하는 결의문을 공동 작성하고 낭독했다. 이후 재미 한인들이 조직한 항일 무장조직 활동에도 참여했다.
즉, 유일한에게 미국 대학에서 얻은 교육은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자산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배운 지식과 영어,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조국의 독립을 알리는 데 활용했다.
이 점은 오늘날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한인 후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좋은 교육의 가치는 자신이 얼마나 성공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능력을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성공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이어가는 대신 1926년 한국으로 돌아가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의약품 사업을 시작했다.
기업의 목적을 단순히 돈을 버는 데 두지 않았다. 건강한 국민이 있어야 건강한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 아래 기업을 성장시켰다.
오늘날 유한양행은 창업 100주년을 맞은 한국의 대표적인 제약회사로 성장해 있다. 유한양행 역시 현재 회사의 역사와 정체성을 소개하면서 창업자 유일한의 정신을 기업의 중요한 뿌리로 강조하고 있다.
기업인이 다시 독립운동의 길에 서다
유일한의 독립운동은 젊은 시절 한 번의 참여로 끝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시기 그는 미국에서 다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이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냅코작전(NAPKO Project)이다. OSS는 오늘날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으로 평가되는 기관이다. 유한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유일한은 일본의 패망을 앞두고 OSS가 추진한 한국 침투작전인 냅코작전에 특수공작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0세에 가까웠다.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가족도 있었고 굳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조국의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 다시 행동했다.
결국 일본의 항복으로 실제 국내 침투작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의 독립운동 경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돈을 벌었지만 돈의 주인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의 삶이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기업가 정신이다. 그는 기업을 개인이나 가족의 사유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기업은 사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 이익 역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과 인재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오늘날 유한대학교를 비롯해 그의 이름과 정신을 이어가는 교육·사회사업이 존재하는 것도 이러한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미시간대 동문회 역시 유일한이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사업과 재단을 설립했다고 평가한다. 1971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한국 기업인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1995년 광복 50주년에는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미시간 한인사회가 유일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유일한의 삶을 미시간에서 다시 바라보면 특별한 의미가 생긴다. 지금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앤아버, 수많은 한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미시간대학 캠퍼스에서 약 100년 전 한 한국 청년 역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 기업을 세웠다. 그리고 기업으로 번 돈과 자신의 능력을 사회와 교육에 돌려주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유일한은 미시간에서 받은 교육을 개인의 성공으로 끝내지 않고 조국과 사회를 위한 자산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앞서 소개한 독립운동가 한시대와도 묘하게 닮아 있다.
두 사람 모두 미시간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교육을 한인사회와 조국을 위해 사용했다.
오늘날 미시간에는 기업인, 의사, 변호사, 교수, 엔지니어, 금융인 등 수많은 한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살고 있다.
유일한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성공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광복절에 이런 인물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광복절 역사교육이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독립운동의 전투만을 가르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유일한 같은 사람의 삶도 함께 가르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은 총을 들고 싸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것도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다. 기업을 세우는 것도 나라를 위한 일이 될 수 있었다. 돈을 벌어 교육과 사회에 돌려주는 것도 국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알리는 것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미시간에서 자라는 한인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100여 년 전 너희가 알고 있는 미시간대학에 한 한국 청년이 다녔다.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살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했고, 기업을 사회에 돌려주고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키웠다.”
이보다 살아 있는 역사교육이 또 있을까.
광복 81주년을 맞아 미시간 한인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독립운동가의 이름만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한시대가 미주 한인사회를 조직하는 데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면, 유일한은 기업과 교육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때 미시간에서 공부했던 젊은 한인이었다.
그래서 광복절을 맞는 미시간 한인들에게 유일한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시간에도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랑스러운 한인 역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