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물 아메리카] 팝 아트의 아버지, 앤디 워홀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이번 주는 팝 아트(Pop Art)의 아버지, 앤디 워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앤디 워홀은 미국 현대미술에 대단히 중요한 영양을 끼친 화가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진작가, 영화 제작자, 음반 제작자, 저술가 등으로 미국 대중 문화 전반에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앤디 워홀은 192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앤디는 어렸을 적 몸이 약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차츰 건강이 회복되자 앤디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상당한 재산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앤디는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앤디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 현재의 카네기멜런 대학에 들어가 상업 미술을 전공했다. 워홀은 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뉴욕시로 갔다. 그리고 ‘보그(Vogue)’ ‘하퍼스바자(Harper’s Bazaar)’ 같은 유명 잡지의 삽화나 광고에 실리는 그림을 그렸다. 워홀의 그림은 인기가 높았고 상업 미술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57년에는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ADC Awards)’라는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1960년대 미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문화계에도 팝 아트 바람이 불었다. 팝 아트는 물질과 대중문화의 산물이었다. 팝 아트 작가들은 순수 미술 세계의 심각한 화풍을 거부했다. 그 대신 지금까지 미술로 간주되지 않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접하는 것들을 그리거나 프린트했다. 잡지에 들어 있는 사진, 음료수 광고, 인기 있는 만화 컷 등이다. 한 비평가는 팝 아트를 ‘대중적이고, 저렴하고, 젊고, 대량 생산적이고, 성적인 것이다’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워홀은 한 인터뷰에서 팝 아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시대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줄여서 말하는 것 같다, 아마 미술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라고 대답했다. 워홀은 이때부터 사람들이 늘 사용하는 흔한 것들을 미술로 탈바꿈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팝 아트 운동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워홀이 연작으로 내 놓은 구두 광고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그림이 됐다. 1962년 워홀은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이 때 내놓은 수프 통조림 그림은 붉은색과 흰색 통조림 캔으로, 미국의 유명한 식품회사 캠벨의 상품을 그린 것이었다.

전시회의 작품은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런 미술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준 것이다. 각 그림이 다 똑같이 보이는데 단 한 가지 숲의 종류를 표시한 글자만 달랐다. 워홀은 또 청량음료인 코카콜라 병, 미국 돈 달러화 표시, 즉 S자에 세로줄을 그은 것, 청소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 같은 것을 그렸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해 작품을 많이 제작하기 시작했다. 실크 스크린이란 이미 그려진 작품을 단시간에 여러 장 복사해 내는 기법이다. 바로 미술품의 대량생산이다.

워홀은 대중적으로 크게 화제가 됐던 것도 자주 그렸다. 예를 들면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갑자기 사망하자 먼로가 출연한 영화에 나타난 얼굴에, 다양한 색을 입혀 대량 생산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 비극적인 사건도 주제로 삼았다. 고전 예술과는 달리 사회에 유행하는 것들을 작품화한 그의 그림은 풍부한 미국 사회를 명쾌하게 나타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워홀은 1964년, 35세 때 뉴욕에 작품 제작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작품을 찍어내는 이곳을 공장이라고 불렀다.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art worker’, 즉 예술 노동자로 불리는 여러 명의 화가를 고용했다.

앤디 워홀은 유명세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흰색의 이상한 가발을 쓰는 등 대단히 유별난 모습을 하고 다녔다. 그는 거의 매일 밤 파티라든가 미모의 여성들이나 유명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가곤 했다.

앤디 워홀은 단순히 화가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 제작자였고, 저술가였고, 음반 제작자이기도 했다. 워홀은 1960년대 초 여러 편의 저비용 예술영화를 제작했다. 그중 하나가 ‘엠파이어(Empire)’다. 이 영화는 뉴욕시의 초고층 건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을 8시간이나 계속 보여주고 있다. 영화 ‘잠(Sleep)’은 친구의 자는 모습을 찍었다. 이 영화도 여섯 시간짜리다.

왜 그토록 유별난 것을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워홀은 “나는 지루한 것, 재미가 없는 것이 좋다”라고 대답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벨벳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라는 록 밴드의 음반을 제작하고 앨범의 표지도 제작했다.

워홀의 또 하나 사업은 잡지 발행이었다. ‘인터뷰(Interview)’라는 이 잡지는 여러 분야의 미국 대중문화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 유명한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매 호마다 유명한 인물의 얼굴이 화려한 색채로 표지에 실렸다. 물론 워홀의 그림이었다.

1968년 6월 3일 앤디 워홀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에 나오는 한 여성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발레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이었는데, 자신이 쓴 희곡을 영화로 만들지 않는데 화가 나서 총을 쏜 것이라고 한다. 세 발을 쏘았는데,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이 그의 양쪽 폐, 위, 식도를 관통했다. 의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나중에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그 총격으로부터 회복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워홀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다.

여러 분야에 손을 대면서도 워홀은 미술 활동을 내려놓는 일은 없었다. 1970년대에는 초상화를 그려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전 세계의 부호들은 엄청난 돈을 주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워홀은 1970년 ‘라이프(Life)’에 의해서 비틀스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됐다. 1972년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 등이다.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워홀의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로 1억 달러에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당시 1억 달러라는 가격은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과 같은 수준이었다. 워홀은 여러 권의 책도 펴냈다. 또 두 개의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제작했다.

재능과 의욕이 넘치는 워홀은 1987년 담낭 수술을 받은 뒤 뜻밖에 숨지고 말았다. 그때 나이 불과 58세였다. 워홀은 타계할 때 1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그의 유산 대부분은 앤디 워홀 기금으로 들어가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 평생 독신이었던 워홀은 피츠버그에 있는 ‘성 세례자 요한 가톨릭 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강 건너 맞은 편 언덕의 노스쇼어 지역에는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세워졌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 미국 최대 규모다.

자신의 예술이나 생활방식을 통해 대중문화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워홀은, 현대 미술의 정의를 새로 쓰고 저세상으로 갔다.

 

V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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