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물 아메리카] 미국의 사과 왕, 조니 애플시드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이번주는 미국의 개척 시기 사과나무 보급에 큰 역할을 한 ‘미국의 사과 왕’  조니 애플시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류의 사과 재배 역사는 4천 년이 넘는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역사가 긴 나라이다 보니 일찍부터 사과를 많이 재배해 왔다. 전 세계 생산량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이 미국, 그리고 인도, 폴란드, 이탈리아, 칠레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미국은 역사가 짧은데, 세계 제2의 사과 생산국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즉 200여 년 전,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해 가던 시기, 사과를 많이 보급한 개척자 존 채프먼(John Chapman)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채프먼은 1700년대와 1800년대 미국의 동부 지역과 5대호 지역에 많은 사과나무를 심었고 또 새로 정착한 사람들에게 씨를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사과 씨, 즉 ‘Johnny Appleseed’라는 별명을 얻었다. 애플시드에 관한 책이나 시도 많이 쓰였다.

존 채프먼은 미국이 공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기 2년 전인 1774년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다. 존은 3남매 중 둘째였다. 어머니는 셋째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루시 쿨리라는 여성과 재혼을 했다. 아버지와 새 엄마는 자녀를 10명을 두었다.

존 채프먼은 나이가 들자 그는 배다른 동생 나다니엘을 데리고 매사추세츠주를 떠나 그보다 남쪽인 펜실베이니아주 서부까지 갔다. 펜실베이니아는 면적이 약 12만㎢나 되니까 무척 먼 거리를 간 것이다.

채프먼은 그곳에서 주인 없는 땅을 일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땅을 빌리기도 해서 사과 농사를 지었다. 초기 정착민들에게 사과는 매우 유용한 식품이었다. 우선 기르기가 쉬웠고, 생과일로 먹기도 하지만 요리를 해서 먹을 수도 있고, 말리거나 설탕에 절여서 먹을 수도 있어서 한 번 수확하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펜실베이니아 서부에서 사과 농장을 늘려가던 채프먼은 1801년 다시 더 서쪽 오하이오 밸리 지역으로 옮겨갔다.

채프먼은 약 400kg의 사과 씨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물이 가까운 곳, 탁 트인 장소, 그리고 토양이 기름진 곳을 골라 여러 곳에 씨를 심었다. 일단 자리를 정하면 불필요한 나무와 잡초를 제거했다. 그리고 똑바로 줄을 맞춰 씨를 심었다. 그리고 짐승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또 씨를 심고, 나무가 자라면 다시 와서 울타리도 고치고 땅을 손질했다.

채프먼은 사업 수완도 좋았다. 미래의 시장성을 생각하며 주로 정착민들이 사는 지역 가까운 곳을 택해 사과를 길렀다. 정착민들에게는 사과와 씨, 그리고 사이다, 주스 같은 제품을 팔기도 했다. 씨가 모자라면 펜실베이니아까지 돌아가 씨를 가지고 왔다. 머지않아 오하이오주 일대에도 사과밭이 많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조니 애플시드, 즉 ‘사과 씨 조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조니 애플시드는 키가 작았으나 무척 열정이 많고 담이 큰 사람이었다. 총이나 칼 같은 것도 없이 혼자서 산을 돌아다녔다. 신발도 신지 않고 잠은 노천에서 잤다. 옷은 머리와 팔이 들어갈 구멍만 낸 자루 같은 것을 쓰고 다녔다.

그래도 음식은 해 먹어야 하니까, 꼭 냄비는 하나 들고 다녔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 없는 거지 같은 모습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집이나 옷을 마련할 수도 있었지만 애플시드는 자신이 좋아서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애플시드는 사실 성공적인 사업가였는데,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 돈을 쓴다면 사과 농사를 개선하는데, 또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썼다. 그래서 정착민이든 원주민들, 그러니까 인디언이든 모두 그를 반가워했다고 한다.

여행을 다닐 때 흔히 사람들은 그를 식사에 초대했다. 초대를 받았을 때는 반드시 그 집 아이들이 먹을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던 것이다. 먹는 것도 소탈했다. 그리고 음식을 낭비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애플시드는 오하이오를 떠나 더 서쪽 오늘날의 인디애나주로 갔다. 거기서도 사과밭을 많이 일구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른 사과와 씨를 다른 지역에도 팔았다. 전해지는 자료에는 애플시드가 켄터키와 일리노이, 그리고 오늘날의 웨스트버지니아에까지 사과밭을 확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애플시드는 요새 말로 하면 자연보호 운동가이기도 했다. 인간은 먹고살 수 있는 것을 땅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자다가 독사의 일종인 방울뱀한테 물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뱀을 죽였는데, 늘 그 뱀한테 미안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처녀지인 곳들, 특히 인디애나나 오하이오 같은 지역에는 곰이나 늑대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런 짐승을 해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미국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라 불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탈리아 성직자로,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돕는 로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했다.

존 채프먼은 기독교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 스웨덴 사이언티스트 교파인 뉴예루살렘 교회에 속해 있었는데,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늘 성경을 읽었다. 그런 채프먼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한 토착 인디언들도 있었다. 인디언들은 채프먼을 신내림을 받은 사람이라고들 말했다. 그래서 아무리 공격적인 인디언이라도 채프먼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채프먼이 그렇게 돌아다닌 기간은 40년이 넘었다. 일생 본인이 직접 일구었거나 씨를 주어서 조성된 사과밭은 다 합치면 무려 26만㎢나 됐다. 한반도 넓이가 22만㎢라는 것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지역에 사과를 보급한 것이다.

1845년 채프먼은 병이 들었다. 그러다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을 방문했을 때 폐렴이 도졌다. 그리고 친구인 윌리암 워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70세로 숨을 거두었다. 채프먼은 숨을 거두면서 144만여 평의 과수원을 누이동생한테 주었다. 그는 인디애나, 오하이오 등 여러 주에 광대한 과수원, 수목원 등을 남겼다. 어떤 것은 당국에 등기를 안 한 채 놔두는 바람에 정부에 귀속되기도 했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은 워싱턴에도 알려졌다. 텍사스 출신인 샘 휴스턴 상원의원은 추모사에서 채프먼을 ‘사랑의 일꾼’이라고 묘사하고, 그의 일생과 업적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 기념관, 학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의 정신을 되살린 축제와 운동 경기도 열리고 있다. 위대한 인물을 소개하는 기념 우표에도 그가 등장했다.

인디애나의 포트웨인 부근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다 간 사람이 잠들어 있다”고 새겨져 있다.

V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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