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대학 떠나는 외국인 교수들, 왜?
자국 교수들 극심한 경쟁구도에 끼어버린 애매한 ‘포지션’
외국인 교수들 ‘우린 언제까지 손님인가?’ 벙어리 냉가슴
며칠 전 미시간대 캠퍼스 앞에 있는 카페에서 오랜만에 무료로 배포하는 대학신문인 <더 미시간 데일리>를 봤다. 외국인 교수·강사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한 기사가 크게 보도돼 흥미있게 읽었다. 영어 원어민 화자가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과 거리감을 느낀다는 지적이 지배적이었다.
브라질 출신 교수의 말은 인상적이다. 그는 “영어와 문화가 다르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이 자신을 ‘2류 교수’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첫 수업 때부터 눈치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교수는 후에 미국인으로 귀화했지만 학생들이 여전히 ‘외국인’이라는 타자로 자신을 본다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그런데 미시간대는 미국대학 ‘랭킹’으로 보면 15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국제 랭킹에서도 25위 안에 들어가는, 이른바 ‘명문대학’이다.
19세기 국제교류에 앞서간 대학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에 친숙한 편이고, 미국에서 인종갈등이 가장 심한 도시 중 하나인 디트로이트가 불과 40킬로미터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인종문제에 유독 민감한 편이다.
앤아버라는 대학도시 안에서 미시간대는 오래전부터 인종갈등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있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대학이기도 하다.
대학 내 서열문화 ‘외국인’ 낄 자리 없어
이런 배경에서 정작 외국인 교수·강사들이 인종차별적 시선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이다. 흥미롭게도 한국대학의 외국인 교수가 이곳과 비슷한 소외를 느낀다는 기사가 최근 <교수신문>에 실렸다. 대학원생들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부담을 느껴 외국인 교수를 지도교수로 선택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이 때문에 외국인 교수들은 연구실을 꾸리지 못하면서 연구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다. 또,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 교수들의 경우 학과회의나 학사행정에 참여할 수 없어서 소외를 느낀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외국인 교수의 ‘소외’현상은 비단 미국과 한국대학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지난 6월 일본 교토에 머물면서 고등교육을 연구하는 교수와 식사를 했다. 일본 정부가 2012년 도입한 ‘글로벌인재육성’정책은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외국인 교수 채용과 영어강의 확산을 지원하고 있다. 당시 이 교수가 말하길 “교토대처럼 규모가 큰 국립대학에는 외국인 교수가 많이 늘었지만, 교수들이 일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서 소외를 느끼고 스스로 고립되고 있다고 느낀다”는 거다.
한국·미국·일본의 고등교육 역사와 제도가 서로 많이 다르긴 하지만, 외국인 교수가 소외를 느낀다는 공통점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해결책은 없을까?
‘소외감’라는 것은 소속한 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된다.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고민할 대상이 되지도 않았을 테지만, 소외감에 시달리는 것은 외국인 교수가 교육·연구와 관련, 학내 의사결정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싶은 의욕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외국인 교수들은 왜 참여하지 못할까?
주로 언어장벽 탓일 거라는 지적이 많지만, 미국의 경우 외국인 교수·강사가 고도한 수준의 영어실력이 있고, 한국이나 일본도 외국어를 잘 하는 현지 교수가 얼마든지 있다. 궁극적으로 ‘영어 패권주의’가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수많은 학문분야의 연구성과를 영어로 발표하고 통용하기 때문에 외국인 교수가 오히려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대학은 외국인 교수들의 언어장벽을 완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고, 현명한 방법들을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언어문제는 다분히 주변적인 요인이다. 대학 내에서 교수 개개인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보이지 않는 벽’을 지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교수나 학생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이 많지만, 대학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기관이다. 변화를 잘 수용하고 연구를 통해서 오히려 변화를 이끄는 대학도 있지만, 이들 역시 의사결정과정은 비민주적인 측면이 많다.
국가를 막론하고 대학엔 뚜렷한 서열이 존재한다. 교수든 학생이든 명예(정교수 승진, 학점)와 돈(연구비, 장학금)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보수적인 의사결정과정과 제도를 잘 활용해야 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 튀어나와 ‘남’을 경계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사회적 자본’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인의 ‘인생의 기회(life chances)’를 높이는 건 금전적 자본만큼 중요하다. 명문대학일수록, 인기 있는 전공일수록, 학업의 성과를 높일수록 인생의 기회는 많아지기 때문에 대학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구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경쟁이 극심한 대학 안에서 ‘글로벌화’라는 이상주의적 목적으로 온 외국인 교수나 강사는 애매한 입장(position)일 수밖에 없다.
교수의 경우, 외국인 교수가 적극적으로 학교 생활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게 되면 외국인 교수가 자신(자국 교수)의 경쟁자가 되기 때문에 타자화해서 ‘손님’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외국인 교수가 가르치는 강의에는 관심이 있지만, 학업성과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낯선 외국인 교수는 결국 ‘불안한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앞서 언급한 브라질 출신의 교수도 미국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귀화까지 했지만 막힌 대학문화 안에서 ‘이방인’이라는 존재로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공동연구지원·팀티칭’등 인센티브 고려해볼만
문제는 해결책이다. 대학 안에서 저마다 ‘인생의 기회’를 얻기 위한 경쟁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경쟁이 대학의 원동력이 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러나 외국인 교수에게 ‘손님 대우’를 강화하는 것은 소외감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만 생길 것이다. 학생들에게 외국인 교수를 그저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려해 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대학 내 경쟁구조를 인정하고, 외국인 교수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도록 ‘인센티브제도’를 마련하는 건 어떨까? 예컨대 외국인 교수를 위한 ‘공동연구 지원 제도’를 도입하거나 외국인 교수와 팀티칭할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더 열린 태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교육과정 안에 외국어 교육과 다른 문화를 이해시키는 내용을 강화하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중요한 건 외국인 교수를 타자화 하는 ‘손님 대우’를 피하고, 외국인 교수들이 연구와 교육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의욕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외국인 교수를 뽑을 때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보다는 연구·교육에 전념하는 사람을 잘 가려내야 할 것이다.
특히 외국에서 교수생활 하는 것을 본인 인생에서 귀중한 기회이자 흥미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외국인 교수로서 겪게 될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
미국 미시간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1987~1992년 KAIST·고려대, 1995~2008년 일본 구마모토가쿠엔대·교토대·가고시마대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08~2014년 서울대 국어교육과 부교수를 지내고 현재는 미국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제공: 교수신문 / http://www.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