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처치 곤란한 서대

추석을 두어 주 앞두고 좀 색다른 광고지가 도착했다. 전라도 지역 이곳저곳에서 직접 공수해 온 특산물들을 추석을 맞아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더우기 전라도가 고향인 내겐 엄청나게 매력적인 뉴스였다. 내가 좋아하는 돌산의 갖김치를 비롯하여 여수의 서대 그리고 온갖 종류의 젖갈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년과 달리 유난히도 고향생각이 많이나고 고향의 어머니가 눈물겹게 그립던 차에 고향에서 날아온 특산물들은 거절하기 힘든 유혹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내를 보채기 시작했다. 톡쏘는 돌산 갖김치 좀 먹어 봤으면. 저놈의 서대만 먹으면 펄펄 하늘이라도 날겠노라고. 서대을 쪄서 먹으면 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느냐고 야단 법석을 떨었다. 결국, 자기 생활에도 바쁜 아내는 그래도 남편이 저리도 보채는 서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사람 소원 못들어주랴 하며 트로이까지 먼 발걸음을 했다. 10마리에 30불이란 거금을 주고 사 온 서대. 상위에 올라온 이놈의 서대. 모양새 부터가 아니올씨다다.

왜 서대가 쌕깔이 하얗지? 나중에 알고보니 껍질을 미리서 벗겨서 그렇단다. 그리고 왠지 작아 보이기도 했다. 찜을 했기는 했는데, 왠지 맛이 그 맛이 아닌거다. 거기에 짜기는 말할 수 없이 짜기까지 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아는 서대 요리를 먹고 자란적이 없다.) 아내가 그렇게 애를써서 구입하고 요리한 서대이기에, 맛있게 먹는 시늉이라고 해야 할텐데 도저히 연극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도 다섯 마리나 남았있다. 그렇게 엄청난 갈망의 대상이었던 서대가 이제는 처치 곤란이다. 이제 다섯마리는 우리에게 큰 숙제로 남아있다. 앞으로 어떻게 요리를 해야 내가 어렸을 때 즐겨먹던 그 맛이 살아나려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왠지 속은 느낌이다. 누가 나를 속여서가 아니다. 내가 본인의 노스탈지아(nostalgia)에 속은 것이다.

속은 느낌을 갖게 된 건 이번 만이 아니다. 어릴적 강냉이 튀밥이 생각나서 “헝그리 강냉이 돌아온 강냉이”라며 “삶이 피로 할 때가 있습니까? 고향을 생각하세요.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입니다”라는 노스탈지아에 호소하는 표장 문구에 유혹되어 강냉이를 몇 봉지 한국 그로서리에서 산 적이 있다. 그 것 뿐만 아니었다. 건빵도 사 먹었다. 옛날에 먹었던 별사탕도 들었다며 유혹하는 건빵이었다. 어느 매정한 인간이 감히 이런 향수의 달콤함을 거절하겠는가. 근데 이것들을 먹고 날 때마다 공통된 경험을 하게 된다. 뒷맛이 씁쓸하다. 이맛은 아닌데. 이맛은 아닌데하며 고개를 젖게 된다.

다시 깨달았다. 정작 내가 먹고 싶었던 건 꼭 서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서대와 얽힌 나의 유년시절을 “먹고” 싶었던 거다. 서대는 나 스스로가 그려낸 낭만적인 유년의 이상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했다. 쉴새없이 찰랑대며 손짖하는 고향의 앞바다, 그 은빛 바다위에서 쪽배를 저으며 키우던 소년시절의 꿈, 고흥만으로 기울이는 노을에 물든 황금바다, 그 바다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애틋한 동경. 이런 이미지와 서대는 나에게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이미지와 결별된 미시간의 서대는 나에게 의미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내가 동경하는 이상의 세계와 괴리감만 증폭시켰을 뿐이다.

정지용시인의 “향수”는 고향을 떠나야하는 사람의 애절한 마음을 잘 표현한 걸로 유명하다.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기 전 1927년에 고향에 들러, “황소가. . .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썼다. 정든 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구구절절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내가 서대를 먹고 싶다고 야단을 떨 때에 정말이지 나는 1920년대에 정지용시인이 표현한 그런 (지극히 목가적이기기도 하지만 나의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이미지의 향수가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작 내가 아내를 통해서 원했던 건, 프로이드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유년시절의 순수한 모성과의 합일, 그자체를 무의식적으로라도 갈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구도에서 보면 현재의 나의 이국땅의 생활은 소년시절의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이상화된 충만함과 비교할 때 결핍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결핍과 단절을 극복하고 싶은 충동이 나의 내면에서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12세기 프랑스 스콜라학파의 신학자 Hugo of St. Victor는 Didascalicon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The man who finds his homeland sweet is still a tender beginner; he to whom every soil is as his native one is already strong; but he is perfect to whom the entire world is as a foreign land.” (자기 고국을 달콤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아이이고, 모든 땅이 다 자기 고국처럼 생각되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전 세계가 다 낯선 땅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야 말로 완전한 사람이다.)

Hugo의 말을 빌려보면 고향의 달콤함에 사로잡힌 나는 분명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다. 20여년 동안 몸을 담고 산 이곳 이국 땅을 고향처럼 여기지 못하고 아직도 고향의 옛추억을 그리며 그곳의 달콤한 향수에 젖어있으니 말이다. 영어로 Nostalg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Nostos (집으로 돌아감)와 Algos (고통)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이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병이 난 상태를 가르킨다. (호머의 오딧세이 장군, 아내 피넬로피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데 20년이란 세월이 걸린 그에게 Nostalgia는 그의 모든 정신상태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수구지심(首丘之心)-여우도 죽을 때는 저 태어난 곳으로 머리를 향한다 – 처럼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지만 지나칠 때는 나 자신을 현실로 부터 괴리시켜 지나치게 과거를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는 건강하지 못한 mentality를 낳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하면 Nostalgia가 치나치면 처치 곤란한 서대를 안게되는 것이다.

송재평 교수 (jaypso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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