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인생은 사랑 그 자체였다

[앤아버=주간미시간] 김택용 기자 = 앤아버의 큰 별이 떨어졌다. 앤아버 한인 사회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상용 장로가 지난 수요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1년여간 위암과 투병해 오다가 지난 년말부터 잠깐 차도를 보였으나 암세포가 전이하면서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앤아버 한인사회는 물론 미시간대학 측에도 커다란 손실이다. 4달러를 가지고 앤아버에 도착한 이후 부동산업 등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쌓은 부를 남을 위해 바쳐온 그의 삶은 ‘사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1984년 미시간 대학교에 한국 관련 교육과정을 설립하고자 앤아버 지역 교민들과 함께 한국학 후원회 준비 모임을 결성했고 그후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동 대학은 1990년 한국어 과목을 개설하였고 1995년에는 Korean Studies Program이 대학 공식 기관으로 설립된다.
그 이후에도 남상용 장로는 한국 관련 교육 프로그램과 연구 활성화를 위해 다방면에서 헌신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7년 한국어 과목 수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남 에세이 콘테스트가 시작되었고 2003년에는 미시간대학교 미술박물관내 이운형 / 국제교류재단 한국 상설 전시장이 만들어 지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남 장로는 헤이슨캠프 씨가 소장하고 있던 도자기류를 구입하여 캘러리에 전시하도록 했다.
남상용 장로의 한국학 연구소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연구소를 위해 4백만 달러를 기증해 2007년 한국학 프로그램이 한국학 연구소로 격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시간 대학교는 2010년 8월 한국학 연구소를 ‘남 한국학 연구소’로 명명하고 북미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학 연구소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4월 1일 열린 장례식에 참가한 3백여명이 넘는 조객들은 남 장로의 죽음이 만우절의 거짓말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 그가 떠난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행을 맡은 앤아버 한인교회 손경구 목사는 “3년전 건강하실 때 장례 부탁을 받았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줄은 몰랐다”고 말하고 “직업적으로 말을 많이 해야하는 목사보다 더 말이 많으셨던 남 장로님은 늘 긍정적인 말씀만 하셨다. 정말로 보내고 싶지 않은 분이었다”고 전했다.
미시간 대학 인문대학장 테리 맥도널드 교수는 “남 장로님은 기적적인 일군이었다”고 말하고 “미시간 대학은 한국학 발전을 위한 전국 네트워크를 세울 계획을 바탕으로 코리아 파운데이션에 3백만 달러를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 장로님이 씨뿌리고 키워 오신 미시간 대학의 한국학 연구소를 미국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자”고 당부했다.
남 한국학 연구소 곽노진 소장은 “매주 수요일이면 남 장로님은 캠퍼스를 도시며 우리를 격려하곤 했다”고 말하고 “연구소에서 개최하는 특별 강연회에도 매번 참석하시며 늘 뜨거운 질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장로님의 사랑의 영향력이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미쳤다”고 말하고 “남 장로님은 남센터와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라고 전했다.
캘빈 신학대학교 이원우 교수는 “남 장로님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고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진한 만남이었다”고 말하고 “그 분은 누구를 만나던지 그들의현실과 입장을 배려했던 분이었으며 그의 꿈에는 많은 사람들의 꿈이 녹아져 있었다”고 전했다. 남상용 장로는 캘빈 신학교에서 학업하고 있는 유학생 및 선교사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지원했었다.
남 장로의 장남인 앤디 남은 답사에서 “아버지에게 패밀리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까지 포함했다”고 말하고 “아버지는 순수하고 정직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4D를 유념하도록 교육했는데 그것은 Dream, Desire, Determination, Drive였다”고 설명하고 “늘 하시던 아버지의 잔소리를 이제서야 이해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남 장로가 암과 투병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아버지는 항상 희망을 놓지 않으시고 긍정적이셨다”고 전했다. “봄이 오면 가족들과 골프를 칠 기대감에 골프채를 닦아 놓고 4월을 기다렸는데 아버지에게 4월은 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병원에 입원하신 후 지난주 일요일 새벽 6시 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한다고 떼를 쓰시다 말고는 몸을 앞으로 수구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한 엔디 군은 “이제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던 일은 끝났지만 그의 꿈은 우리들의 손에 이어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차남인 토니 군도 답사에서 감정에 복받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식이 슬프게 끝나기를 원치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마지막 순서로 미시간 대학 풋볼 팀의 응원가를 함께 외칠 것을 조문객들에게 제안했다. 남상용 장로가 생전에 자신의 모교였던 미시간 대학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그대로 반영한 세레모니였다.
기자에게 비친 남 장로님
남상용 장로는 기자에게도 특별한 분이었다. 자주 전화를 주셨는데 아들벌밖에 안되는 기자에게도 한 번도 말을 놓지 않으시고 존대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셔서 항상 몸둘바를 몰랐었다.
늘 자녀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챙기시며 인사를 나누셨고 나이는 다르지만 ‘뜻이 통하는 친구’라는 표현을 쓰셨다. 본보에게 가장 많은 기사 거리를 주신 분중에 하나이고 기자가 가장 많이 만났던 분이기도 하기에 세대를 넘어선 우정이 쌓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지난 1월 출판 기념식이 끝난 다음 날 전화로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한국학 연구소를 위해 더 큰 기부를 해야 하겠다는 것과 앤아버 한인 사회를 위해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고 싶다는 또 다른 꿈을 얘기하며 그는 새로운 삶의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 없는 절박감을 토로했었다.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꿈을 꾸는 사람은 항상 외롭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역사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씌여진다. 그 분이 떠난 자리는 생각보다 크다. 그 분이 못다 이룬 꿈의 공백은 더욱 커보인다.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꾸던 꿈을 보지 못하고 떠난다. 월트 디즈니도 그가 시작한 디즈니 월드의 꿈을 생전에 보지 못했다. 마틴 루터 킹도 그의 꿈이 오바마를 통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꿈이 죽음으로 인해 끝나지 않는 것은 그 꿈을 이어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릴레이 달리기에서 다음 주자가 바통을 이어받고 또 달려 나가듯이 우리는 그의 꿈을 이어받을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앞으로 누가 또 이렇게 외로운 꿈을 키워갈지 의문이지만 당분간은 그분이 떠난 자리가 매우 크고 쓸쓸하게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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