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가 낳은 아이를 잡아먹고 나서…

유승원 목사
작년의 금융대란 이후 지금은 여전히 어려운 때입니다. 삶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 마련입니다. 비가 오는가 하면 찬연하게 맑아 하늘을 날듯 할 때도 있습니다. 제게는 단순한 바램이 아닌 깊은 희망의 확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약간의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의 미시간이 더 견고하고 아름다운 고지를 밟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한국이 IMF 상황에서 절망할 때 저는 가족을 일찍 들여 보내고 혼자 남아 학위논문을 마무리해야 되었습니다. 그때의 다소 서럽던 느낌이 오늘날의 번영과 대조되어 현재 우리의 땅을 조명하는 희망이 됩니다. 아, 저럴 때가 있었구나… 어려움은 생명의 가치를 높여주고 의미있는 생명은 미래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그때 1998년 초의 단상을 되돌아보며 오늘의 희망을 굳게 합니다.

세상에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잡아서 음식으로 먹을 수 있을까? 인간은 극한상황에 달하면 평범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저지른다. 주전 589년부터 2년 동안,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현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무리한 반기를 들었던 유대의 시드기야 왕을 제거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식량과 물자의 공급을 일체 차단시켰다. 그 결과 성내의 거민 들이 겪는 고통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목격했었던 한 눈물의 선지자가 가슴을 찢으며 읊은 노래가 바로 구약 성경의 “애가서”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그랬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여인들이 자기 아이들을 식량으로 삼아 내 주어야만 하는 처참하고 끔직한 사건까지 있었다(애가 2:20, 4:10).

고대의 전시 상황과 우리의 현실을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애가서 곳곳에 묘사된 처절한 경제난을 읽다보면 IMF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조국의 고통을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연초에 한국에 먼저 간 가족들과 연락을 취해 보니, 신년 아침에 떡국을 끓여 먹는데 만두를 넣지 못해서 덩그러이 떠다니는 흰떡만 건져 먹었다고 한다. 동작이 빠르지 못한 우리 식구, 남들 사재기할 때 멀뚱멀뚱 하고 있다가 동네 슈퍼에 가보니 밀가루가 다 떨어져 버렸단다. 설탕을 못 산지는 이미 몇 주가 지났다고 하고… 그까짓 몸에 안 좋은 설탕, 없어서 더 잘 되었다고 자위를 하지만 서글픈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태권도장 관장님이 연말에 관생들에게 나누어 준 돼지 저금통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쓸려고 ‘무진장 많은 돈’(tons of money)을 넣어 두었다고 걱정 말라는 이메일을 보내온 딸아이의 농담이 어째 쓸쓸하게 들렸다. 시간이 하루 늦은 이곳에서 새해를 맞은 나는, 괜히 죄책감이 들고 속도 상해, 전화를 끊어 놓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일부러 라면으로 하루를 때웠다. 회사가 부도가 나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새해를 맞은 막내 동생네 식구들의 수심 어린 얼굴도 자꾸 떠오르고… 그렇게 우리는 차갑고 어두운 무인년을 열었다.

그러나, 인간의 존귀함은 어려울 때도 참 인간일 수 있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으로 보면, 고난을 겪어 본 인간들만이 삶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깊이 있게 알고 의미 있는 문화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 같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것이라 했는데, 어찌 생각하면 적당한 고통은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인류의 사고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 구약성경의 약 70 퍼센트 가량이 아이를 잡아먹는 비극이 있었던 바벨론 유수를 전후로 해서 편집, 완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요즘의 신세대들에게서 왠지 사고의 깊이를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너무 편한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 아닌 가도 생각한다. 전후의 가난과 방황, 유신과 5공의 독재, 탄압을 이겨 나와야만 했던 세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강요받았으며, 그러한 사고와 실천의 고통 가운데 생성된 정신문화의 짙은 밀도 같은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있었다. 어쩌면 IMF라는 예방주사는 그 동안 초콜릿의 단맛만 알고 살아왔던 우리의 자식들에게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인생의 교육과 생각하는 삶을 회복하는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 문인들이 “가난을 불쏘시개로, 정렬을 태워서 만드는 것이 문학”이라고 하며 이 시대의 어려움에 오히려 결의를 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학은 빈곤이 필요한데, 문학의 본 모습을 불황이란 거울에 비춰보는 호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노시인 고은님의 말은 더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그렇다. 고통의 시기는 진실된 인간 삶의 가치가 오히려 더욱 빛나도록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입 속으로 들어가는 밥이 인생의 모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엘리 비젤의 「밤」에 보면, 이차세계대전 당시, 며칠을 굶긴 채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옮기던 수송열차에 독일 병사들이 장난삼아 빵 몇 조각을 던져 아비규환을 만드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 기아선상 속에 던져진 빵을 차지하기 위해 연로한 아버지를 때려죽이는 한 젊은 아들의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 놓아 독자들을 경악시키고 있다. 반면에 같은 굶주림을 당하면서 자기 생존을 위해서만도 턱없이 부족한 빵을 옆의 동료를 위해 나누어주는 사랑을 베풀다가 같이 살아남는 이들의 미담도 로고쎄라피로 유명한 빅터 프랑클을 통해서 보고가 되지 않았던가. 이처럼, 상황이 같아도 그 상황판에 다른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으나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면… 끝내 이기리라”는 상록수의 가사를 가슴에 새기고 이 난국을 멋있게 이겨보자. 생명체를 보기 힘든 사막에도 고도의 적응체계를 갖춘 동물과 식물들이 존재한다. 그런 생명체들에게서는 환경이 좋은 정글 속에서 부지기수로 발견되는 흔한(?) 생물집합에게서 볼 수 없는 그 어떤 아름다움이 서려있다. 몇 년 전에 가본 North Carolina Zoo의 사막관 출구에 있는 사막 그림에 적혀 있던 글귀 하나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The value of life is much greater in desert.

유승원목사
디트로이트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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