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것이 너무 싫었다. 성경 66권 중에서 그 책의 주제가 가장 심각하게 오해되는 경우가 요나서다. 유년주일학교에서부터 재미있게 듣고 또 듣던 요나의 이야기는 대개 3장에서 끝난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위해 요나를 부르셨다. 요나는 그 사명이 싫어 도망쳤다. 요나가 타고 있는 배가 풍랑을 만났고 사람들이 그를 바다에 던진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나온 요나는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고 니느웨는 회개하여 예고된 재앙을 면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회개와 순종과 사역 성공의 이야기인가.
그러나 여기서 끝내는 요나 이야기는 중요한 결론을 거두절미하고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여 사람을 골탕 먹이는 질 나쁜 방송 다큐멘터리와 같다. 요나서의 주제는 4장에 집약되어 있다. 성공한 선교사 요나는 기뻐하기는커녕 분노가 머리끝을 넘어 하늘 끝까지 솟는다(욘 4:1). 왜 그랬다고 하는가? 대답이 기가 막힌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성국으로 결국 열 지파의 북쪽 왕국을 멸절시키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케 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너무 속이 상했다(4:2).
그의 말을 풀어본다. “하나님! 이럴 줄 알았어요. 저놈들을 용서하실 줄 내가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도망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이 많기 때문에 저들을 구원하신 줄 제가 일찌감치 알고 있었어요. 정말 싫어요!”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싫었다. 미워 죽을 지경으로 싫었다. 그로 인해 요나가 4장에서 보이는 우스운 꼴에 배꼽 잡고 웃은 뒤, 꼭 나 자신을 돌이켜 보자. 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싫어서 분노하고 원망하고 질투하고 좌절하지 않았던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 때문에 신앙과 더불어 인생 전체를 잃어버렸던 살리에르처럼. 조금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의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분의 신애가 아들 유괴범의 감옥 회심 때문에 멘붕 상태에 빠졌던 것처럼…
유승원 목사의 목회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