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하루 품삯을 조국에 보냈다…우리가 잊고 있던 미주 독립운동가들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우리는 광복의 기쁨과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되새긴다. 그러나 광복절에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대개 몇몇 유명한 독립운동가에 머물러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과연 그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는 조국을 떠나 광산과 농장, 철도 공사장과 세탁소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던 한인 이민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넉넉해서 독립운동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 품삯의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내놓았고, 여성들은 바느질과 노동으로 번 돈을 모았으며, 학생들은 미국 사회에 한국의 현실을 알렸다. 한인들은 신문을 만들고 단체를 조직하고 자녀들에게 한글과 조국의 역사를 가르쳤다.
어떤 이는 미국 사회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어떤 이는 미주 각지를 돌며 독립자금을 모았다. 또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역사책에 제대로 남지 않은 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했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이 몇몇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역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미주 한인사회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미주 한인사회의 조직적 기반을 만든 안창호, 미국 사회에 한국을 알린 서재필뿐 아니라 미시간대학에서 공부한 뒤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된 한시대, 미국 서부를 돌며 독립자금을 모은 김호, 노동과 바느질로 번 돈을 조국에 보낸 강혜원, 안창호의 동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혜련, 그리고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간 박영숙이 그들이다.
올해 광복절에는 이들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았으면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독립운동의 기록만이 아니다. 멀리 떨어져 살아도 조국과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역사와 정신을 물려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7인의 삶을 다시 살펴본다.

도산 안창호(1878~1938) — 미주 한인사회의 조직자
안창호는 미주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인물이다. 미국에서 한인사회를 조직하고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주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외교활동과 재정 모금을 호소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안창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 “독립할 수 있는 국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오늘날 미주 한인사회가 후세 교육을 고민할 때 특히 되새길 만한 인물이다.
서재필(Philip Jaisohn, 1864~1951) — 미국 사회에 한국을 알린 선구자
서재필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민권·계몽운동가 가운데 한 명이며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 국민의 권리와 정치 참여를 강조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국의 독립 문제를 미국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에는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활동을 확대했다. 서재필이 오늘날 미주 한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도 한국과 한인사회의 문제를 미국 주류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시대(韓始大) — 미시간과 연결되는 특별한 독립운동가
미시간 한인들에게는 특히 한시대를 소개할 가치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하와이로 이민한 뒤 미국 본토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국가보훈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전미 대학 웅변 관련 단체의 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동력이 뛰어났다. 이후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미주 한인사회의 힘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100여 년 전 미시간에서 공부했던 한인 청년이 훗날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미시간 한인 청소년들에게 소개하기에 매우 좋은 역사적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김호 — 미국 서부를 돌며 독립자금을 모은 사람
김호는 191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등 미주 한인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특파위원으로 미국 서부지역을 약 두 달 동안 순회하면서 1만원이 넘는 독립자금을 모았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경제적 형편을 생각하면 상당한 규모였다. 김호의 삶은 독립운동이 유명 지도자 몇 사람의 활동만이 아니라 평범한 이민자들이 조금씩 내놓은 돈과 노동으로 유지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혜원(김혜원·Sarah Kang) — 하루 15센트를 벌면서 독립자금을 모은 여성
후세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강혜원은 하와이 노동이민을 거쳐 미국 본토로 이동한 뒤 1919년 신한부인회와 대한여자애국단 결성에 참여했고 초대 단장을 맡았다. 국가보훈부 기록에 따르면 힘든 노동과 바느질 등으로 돈을 벌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대한여자애국단이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한 금액은 장기간에 걸쳐 4만6천 달러가 넘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돈으로 단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희생이다. 부유한 사람이 남는 돈을 기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줄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돈을 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혜련 — 안창호의 ‘부인’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부인으로만 알려지기 쉽지만 이혜련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미국에서 안창호와 함께 한인사회를 조직했고, 1919년 미주 여성단체들이 통합해 대한여자애국단을 만드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후 국민의무금과 각종 독립운동 의연금 모금에도 앞장섰다. 이혜련을 통해서는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과 함께 여성들의 역할이 독립운동사의 주변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다.
박영숙(한영숙) — 1919년부터 광복까지 이어진 여성 독립운동
박영숙은 1919년 캘리포니아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 조직에 참여했고 이후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동료들과 함께 500달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남편 한시대와 가족 전체가 독립운동과 한인 2세 민족교육에 참여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