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CEN·FATF 잇따라 경고…‘돼지도살형’ 투자사기와 디지털 자금세탁 확산
[주간미시간=김택용 기자] 가상자산과 온라인 금융서비스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금융 범죄의 수법도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미국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반(FinCEN)과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가상자산, 스테이블코인, 비공식 송금망 등이 국제적인 투자사기와 자금세탁에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미국 금융당국이 주목하는 것은 이른바 ‘돼지도살형(Pig Butchering)’ 투자사기다. 이 사기는 피해자에게 처음부터 거액 투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범죄자들은 문자메시지나 소셜미디어, 메신저, 온라인 데이팅 플랫폼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근한 뒤 상당 기간 친분과 신뢰를 쌓는다.
이후 자신이 가상자산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거나 특별한 투자기회를 알고 있다며 피해자를 특정 온라인 투자 플랫폼으로 유도한다. 처음에는 소액 투자를 권하고 실제로 수익이 발생한 것처럼 화면을 보여주거나 일부 금액을 출금할 수 있게 해 신뢰를 높인다.
피해자가 안심하면 투자금액을 점점 키우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큰돈을 투자한 뒤 자금을 회수하려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계좌가 동결됐다고 주장하거나 세금, 수수료, 보증금 등을 추가로 내야 출금할 수 있다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피해자는 투자금뿐 아니라 추가로 송금한 돈까지 잃게 된다.

FinCEN 자료에 따르면 2023년 9월부터 2025년 12월까지 미국 금융기관들이 신고한 디지털 자산 투자사기 관련 의심거래보고는 3만3,904건에 달했다. 이들 거래와 관련된 금융활동 규모는 약 127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범죄가 개인 사기꾼 몇 명이 벌이는 단순한 사기 수준을 넘어 국제적인 범죄 네트워크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 조직들은 돈의 이동 경로를 숨기기 위해 은행계좌, 핀테크 플랫폼, 가상자산 지갑, 해외 거래소, 유령회사 등을 복합적으로 이용한다. 이 과정에서 ‘머니뮬(Money Mule)’도 자주 활용된다.
머니뮬은 다른 사람의 돈을 자신의 계좌로 받은 뒤 또 다른 계좌로 보내주거나 현금으로 인출해 전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일부는 범죄자와 공모하지만, 일부는 단순히 “돈을 대신 받아주면 수수료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범죄인 줄 모른 채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의 출처가 사기나 불법행위와 연결돼 있을 경우 본인의 은행계좌가 동결되거나 금융기관의 조사를 받을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형사 책임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 FATF는 전통적인 비공식 송금망인 ‘하왈라(Hawala)’도 국제 자금세탁의 주요 경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왈라는 은행을 통한 공식적인 국제송금 대신 각 지역의 중개인들이 서로 장부를 맞추는 방식으로 돈의 가치를 이전하는 시스템이다. 실제 현금이 국경을 넘어가지 않아도 미국의 중개인과 해외의 중개인이 서로 정산하는 방식으로 송금이 이뤄질 수 있다.
FATF 조사 대상 국가와 지역의 80% 이상은 이러한 비공식 송금 서비스가 전문적인 자금세탁의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답했다.
최근에는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과거 현금 중심이었던 비공식 금융망이 가상자산과 핀테크 기술을 만나면서 이른바 ‘디지털 하왈라’ 형태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과 디지털 지갑을 이용하면 전 세계 어디로든 자금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범죄 조직들은 여러 개의 지갑과 해외 거래소를 거치면서 돈의 출처와 최종 목적지를 추적하기 어렵게 만든다.
한인사회도 이러한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국과 한국 사이의 송금이나 해외 투자 거래가 잦은 한인들은 “은행을 거치지 않으면 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다”, “가상화폐로 보내면 더 빠르다”, “내 계좌로 돈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보내주면 사례비를 주겠다”는 제안을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또 온라인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 암호화폐나 주식, 외환 투자를 권하거나 지나치게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고 말한다면 의심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인 투자는 원금을 보장하면서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익까지 약속하지 않는다. 특히 투자금을 개인 명의 계좌나 개인 가상자산 지갑으로 보내라고 요구하거나, 출금을 위해 세금이나 보증금을 추가로 내라고 요구한다면 대표적인 사기 신호로 볼 수 있다.
투자 전에는 상대방과 투자회사가 실제로 등록된 업체인지 확인하고, 온라인 검색과 금융당국의 등록자료 등을 통해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무엇보다 투자 결정을 재촉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서둘러 돈을 보내서는 안 된다.
이번 FinCEN과 FATF의 경고가 보여주는 것은 금융범죄 역시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자금세탁이 현금가방과 지하 금융조직을 떠올리게 했다면 오늘날에는 은행, 핀테크, 가상자산, 스테이블코인, 해외 거래소와 비공식 송금망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처럼 연결되고 있다. 금융기술이 편리해질수록 범죄자들도 같은 기술을 빠르게 활용한다. 결국 투자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높은 수익률보다 자금의 흐름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돈을 보내는지, 어떤 금융기관을 거치는지, 상대방이 실제 등록된 업체인지 확인하는 기본적인 절차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디지털 금융시대에는 “얼마를 벌 수 있는가”보다 “내 돈이 어디로 가는가”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가장 강력한 투자자 보호장치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