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금은 더 미련하고 싶은 소원…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예기치 못했던 은혜의 선물을 공개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그렇듯이, 신실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에 새로운 부름을 받아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지역으로 섬김의 현장을 옮기게 된 나 자신의 삶을 잠시 돌아보면서 이제 고전이 되다시피 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의 첫 장면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아요. 열어보기 전에는 어떤 것을 먹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 are gonna get…).

포레스트 검프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미련함’의 추억입니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함부로 발언할 수 없었던 단어가 있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 주변에서 회자(膾炙)되는 stupid이란 말입니다. 다른 욕설은 분을 격발시키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 말은 듣는 이의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좌절과 자기 비하를 누적시키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입니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보고 “라가”(아람어로 `비었다‘는 뜻으로 천치를 가리킨다)라 하는 것은 공회에 잡혀갈 만한 큰 죄이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만큼 중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귀중한 인격에 대한 모욕은 곧 살인과 다를 바 없다는 교훈을 베푸시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마태 5:21-22). 생각 없이 함부로 뱉어서는 아니 될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지능지수가 70이 못되는 포레스트의 어리석음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왜일까요?


희화(戱畵)적으로 과장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극작가가 그의 어리석음을 인생 현실에서 항상 아쉬움을 가져오는 행위 영역에 배치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는 어리석고 미련스럽습니다. 포레스트 자신을 포함하여 극 중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가 어리석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객이 여차하면 감지하지 못하고 넘어가기 쉬운 것은 그가 무엇에 어리석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짓궂은 이웃 아이들이 그를 괴롭힐 때마다 한마디 대항도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기만 하던 포레스트가 일생을 두고 사랑하는 여인 제니가 곤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를 전혀 생각지 않고 그녀를 괴롭히는 놈들을 무작정 때려눕힙니다. 사랑이라는 덕(德)에 진지하다 보니 자기 보호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인간 본능의 구구법조차 잊는 미련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월남전에서 자신의 소대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 도망을 치던 포레스트가 친구 버브를 생각하는 순간에 자신의 생명의 위험은 아예 잊어버리고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 다친 전우를 끌어내기 위해 수차례 숲속과 해변 사이를 왕복합니다. 우정이라는 덕(德)에 몰두하느라고 자신의 죽음도 생각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포레스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주어지면 그것에 열심을 내느라고 보통 인간들의 행위의 동기가 되는 명예나 물질적 이익을 계산하는 데는 바보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버브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만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그로 인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날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의 머리속에 없습니다. 그만 보면 악담을 퍼붓는 상이군인 데인이 자신의 소유인 새우 잡이 배에 와서 선장 노릇을 하며 마구잡이로 명령을 일 삼아도 포레스트에게는 그와 자존심 싸움 같은 것을 할 뇌세포가 없습니다. 그는 오직 새우 잡는 일에만 몰두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 보호에 약습니다. 주머니 속의 돈 계산에 빠릅니다.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 싸움에는 제갈공명입니다. 이런 것들에 머리를 굴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 우정, 성실 등의 덕목에 있어서는 그에 몰두할 기억 용량조차 없는 천치(天痴)들이 됩니다. 이해득실의 계산에는 천재인데 사랑에는 저능아입니다. 내게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는 일 자체보다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과 명예를 가늠하는데 시간을 다 보냅니다. 포레스트가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채 잊고 사는, 덕에는 열심이고 이해득실에서 어리석은 순진무구함(innocence)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포레스트의 모습이 어리석은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어리석게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려는 사랑의 일념 때문에 다른 아무 것도 계산할 줄 모르고, 도살당할 짐승처럼 끌려가서 미련하게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지혜를 좇아 산다는 헬라 문화권에서는 “미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미련함은 사람보다 지혜로웠습니다(고린도 전서 1:25). 우리 모두가 조금만 더 미련해질 수 있다면 살벌한 이 세상도 감동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미련함을 우리는 ‘순수함’, 또는 ‘진실함’이라고 부릅니다. 미련할 정도로 순수했던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싶습니다. 어리석을 정도의 순수함이 아쉬운 오늘, 그런 어리석음으로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되뇌어 봅니다. 포레스트의 어리석음이 그리운 오늘, 조금은 더 미련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유승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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