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과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우리 한인들은 매년 3월이 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과 3.1절이지요.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대표자격으로 모인 이분들은 종로에 있는 태화관 별실에서 조선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독립선서를 발표하였으며 그리고 그들은 곧장 일본 헌병들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수 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중에서 만해 한용운선생은 가장 많은 7년 형량을 언도 받고 3년 동안 옥 살이 을 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많은 민족대표들이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선생은 감옥에서도 조선의 기개를 잃지 않고 일제에 협조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詩人)이며 승려이고 독립운동가 이신 한용운님은 충남 홍성군 경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1879년에 출생 하였다.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海) 한용운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 하여 1896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에 실패하고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하며 수 년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 사상을 접 하였다.
1901년 14세 때에 결혼 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가 약 2년간 은신 하다가 그 후 세상은 이렇게 요란 한데 곰곰히 생각 한 나머지 어느 날 새벽에 담뱃대 하나 만 들고 집을 나와 한양을 거처 방황 하다가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중이 되었다.
그 후 만주와 시베리야 를 유랑 하다가 1905년에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3개월간 동양철학을 연구 하였다.
1913년 불교서관에서 불교유신론을 발행하여 불교개혁의지를 천명하고 당시 불교계를 좀 먹고 있는 비종교적, 비합리적, 토속미신적 요소와 인습을 타파하여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으며 그의 문학사적(文學史的)위치는 이 한 권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기개는 고추다래처럼 매운 향기를 토 했고 설중매화(雪中梅花)처럼 찬 바람 눈비를 원망 할 것이 없이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끝까지 민족의 지조(志操)를 지켜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말해주는 수 많은 일화를 남기고 일제의 식량배급과 식음을 거부 하시다 가 영양실조가 되어 1944년 6월29일 해방 1년을 남겨 두시고 육신은 홀연히 사라지셨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 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 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 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황연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