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24승’ 박찬호, “단군 이래 최고의 애국자다”

프로야구의 만년 꼴찌팀을 흔히 우스개로 ‘셀러(cellar)’라고 부른다. 아메리칸 리그(AL)에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내셔널 리그(NL)에선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이런 불명예의 딱지가 붙어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선수들이 뛰고 있는 구단이어서 민망스럽기는 하다.

‘셀러’는 와인 보관 장소다. 지하실에 꾸며져 있어 생전 빛을 보지 못한다. 승률 50%에도 훨씬 못미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하위팀을 그래서 ‘셀러’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셀러’ 피츠버그에서 모처럼 대기록이 하나 나왔다. 박찬호가 숱한 시련과 좌절을 딛고 마침내 메이저리그 아시아선수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박찬호는 1일(현지시간) 선 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째(98패)를 수확했다. 이로써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은퇴)가 보유하고 있던 최다승 기록(123승 109패)을 넘어섰다.

박찬호가 1승부터 124승에 도달하기까지는 꼭 14년 5개월하고도 25일이 걸렸다.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그가 이렇게 오래 뛰면서 대기록을 세울 것이란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박찬호는 돈에 관해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5년동안 무려 7,000만 달러의 몸값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건너가자 당시 주류언론에 회자된 표현이 ‘GTT’였다. ‘텍사스로 가버렸다(Gone To Texas)’의 머릿글자를 따 만든 말이다.

100년 전만해도 텍사스는 기회의 땅이었다. 검은 황금, 곧 석유가 펑펑 쏟아져 일확천금을 챙길 수 있는 그 곳. 박찬호는 ‘텍사스 사이즈’ 만큼의 돈을 받았다며 언론은 그에게 ‘GTT 선수’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러나 이후 부상과 부진의 늪에 빠져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3년 전 뉴욕 메츠에서 한 게임만 뛰고 방출됐을 때 그의 수명은 그걸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재기에 성공한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와 노모가 갖고 있던 기록을 깨뜨리기 위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것.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푼돈’을 받고 양키스의 ‘핀스트라이프’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지만 뉴욕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피츠버그로 이적한 후 다시 힘을 냈다. 오뚝이처럼 털고 일어나 끝내 자신의 야구인생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박찬호의 위업은 개인기록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스포츠의 세계화에도 그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맨발의 투혼’으로 US 여자오픈을 제패한 박세리, 2002 월드컵 4강, 박지성과 박주영 등의 유럽프로리그 진출, 그리고 김연아의 올림픽 금메달도 따지고 보면 박찬호의 성공신화가 밑바탕이 됐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전혀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입성은 젊은 선수들에게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박찬호의 또다른 기여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 놓았다는 점이다. 전쟁과 독재, 반정부시위 등 우울한 것들이 판을 치던 미국 언론의 보도행태를 박찬호는 강속구 한 방으로 날려버렸다.

‘야구의 철학자’ 요기 베라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게 된다.”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박찬호. 아마 단군이래 그 만큼 한국을 널리 알린 인물은 없을 것 같다. 박찬호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자다.

박현일 기자, uko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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