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언론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강사: 한국 언론재단 미디어연구실장 김영욱

한국 언론재단 미디어연구실장 김영욱 발제

한국 언론재단 교육1팀은 지난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회장 정락석) 소속 언론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재외동포언론인 취재실무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주간미시간/미시간교차로를 포함하여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동남아 남미 몽골 등에서 참석한 재외동포 언론인들은 언론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기사작성법, 언론사 사이트 관리법, 블로그 미디어와 뉴미디어의 활용, 신문편집 등에 대한 실무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번 교육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언론실무 교육과 함께 각 언론사의 노하우를 교환하고 상호 발전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로서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다음 내용은 한국언론재단이 해외주요 동포 언론사를 대상으로 2009년 10월 28일 실시한 교육내용입니다. 본 워크샵에 참석했던 주간미시간/미시간교차는 언론재단의 교육 과정을 동포 사회 지도자들도 숙지하여 수준높은 동포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이 시리즈로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강사: 한국 언론재단 미디어연구실장 김영욱(사진)

언론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들어가며

인간에게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정보의 욕구’가 있다.

서 태평양 폴리네시아 지역의 한 섬에 사는 티코피아 원주민들을 관찰한 인류학자 레이몬드 퍼스(Raymond Firth)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겪은 일들을 끊임없이 교환한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그 마을을 찾은 방문객은 방문의 목적인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주민들로부터 그가 알고 있는 최신 소식에 대한 질문을 받아야 한다..

코바치와 로젠스틸은 사람들이 기본적 본능으로 뉴스를 열망한다고 보았고, 이를 ‘인식 본능’(Awareness Instinct)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사건을 인식하기 위해, 언덕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모르는 것에 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고, 그들의 삶을 계획하고 삶의 문제를 헤쳐 나가게 한다. 정보의 교환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 근원이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이 우리의 직접 경험이 닿는 영역 바깥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체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저널리즘의 기본 기능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혹은 사람들이 얻기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라톤 광야를 달려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알리고 숨진 그리스 병사를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폴리네시아 섬들을 돌아다닌 보따리 장사도 다른 섬과 부락을 소식을 전했으니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저널리즘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언론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논의를 위해 이 글은 우선 저널리즘이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으로 저널리즘이 무엇인가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저널리즘이 해야 할 일, 혹은 사회가 기대하는 저널리즘의 역할과 그에 따를 책임을 알아본다.

저널리즘의 출현

저널리즘은 근대화의 산물이며 동시에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시작한 시기는 3만 5천년 전이라고 추정된다. 오늘날과 같은 인류의 발생기를 100-200만년 전으로 잡는다면 인류는 수백만년을 지나며 언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을 ‘발명’해 낸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고부터 글을 발명하기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약 5000년부터 인간은 의사소통 수단에 글을 추가했다. 글을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술, 즉 인쇄술은 지금으로부터 약 550년 전인 1455년 독일의 마인츠에서 개발되었다.

유럽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전단 형태(Flugblatt)의 인쇄물들이 나돌았는데, 이 ‘뉴미디어’는 정치, 전쟁 등과 함께 기적, 마녀 화형, 범죄 등의 이야기들을 전했다. 전단(傳單)은 아직 신문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우리가 이를 신문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
1) 공개성 (누구나 마음을 먹으면 입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파)
2) 시의성 (현재와 관련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것이거나 그에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새롭게 중요성이 부각된 내용),
3) 보편성 (모든 주제가 포함)
4) 정기성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발행되며, 일정한 시한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행)의 네 가지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최초의 신문은 당시 독일에 속했던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에서 1605년부터 주간으로 발행된 ‘Relation’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신문들은 정기적으로 새 소식을 전했는데, 그 중 약 반이 궁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전단지 형태의 정보 전달 매체와는 달리, 매주 정기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세계 최초의 신문이라고 주장된다. 일간(daily)은 조금 더 늦은 1650년 독일의 라이프찌히의 ‘Einkommende Zeitung’에서 시작되었다. 신문이 다양한 주제를 폭 넓게 다루면서 ‘보편성’을 확보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다. 이 시기에 정치 위주의 기사가 처음에는 경제로 확대되고, 다음에는 사회 및 문화 기사로 확대되었다.

18세기 말 독일의 신문 수는 몇 백 개로 늘어났지만, 신문 당 평균 발행부수는 6-700부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인쇄기술의 발전과 신문지 값의 하락을 바탕으로 신문의 수도 늘어나고 대도시 신문의 경우는 발행부수가 수만 부로 증가한다.

일차세계대전 전 독일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전체 판매부수가 약 2천5백만 부로 추정될 정도이다. 이와 함께 신문 내용도 점차 변해갔다. 18세기의 독일 신문이 아직 정치적인 주제에 국한되었다면, 19세기에는 경제, 문화, 법률, 사회문제 등으로 주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신문을 통해 뉴스가 생산되고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유포되면서 저널리즘이 완성된 것일까? 아직은 아니다.

알철은 그의 책 “Agents of Power”에서 신문이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태어났는가를 묻고 있다. 알철에 의하면 정보를 필요로 하고 활용했던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인쇄신문 이전의 필사신문은 제후와 정치인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정보가 필요했다. 다음으로 정보유통이 이루어진 집단은 당시 정신적 지도자이며 교육자 역할을 했던 승려들이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집단이 생겨난다. 그들은 상인과 금융가들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는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다.
인쇄 기술의 발전과 보급으로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과 미국의 곳곳에서 정기간행물이 생겨나면서 ‘뉴스’가 사적인 영역을 공개하기 시작했지만, 정보유통의 기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철의 견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그들 간행물은 권력을 쥐고 있던 세력들이 그들의 환경을 감시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하고 호기를 포착하기 위한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졌던 것이다.”

대중매체로 발전한 신문은 유럽사회의 근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의 도시는 시끄러운 곳이었다. 농민해방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유럽의 도시는 서로 다른 복장과 풍습, 방언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평범한 다수가 가시화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평범한 다수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적 혁명과 폭동, 사회운동, 파업 등을 통해 정치적 힘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당시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렇게 가시화되기 시작한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하나의 사회적 및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 한 시도는 이들을 군중으로 보는 시각이다. 군중은 그 구성원의 지능이나 도덕성에 있어 열등하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폭력적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하면 도시에 모인 사람들을 군중으로 부르는 것은 이들이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반영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는 대중매체인 신문을 통해 이러한 군중이 공중으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했다. 공중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일 필요는 없다. 타르드가 말하는 공중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각각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그것은 물리적 집단이 아니라 상상적 집단이며 상상적 공동체이다.

신문이 전달해 주는 정보를 통해 신문의 독자는 동시에 그 정보를 소유한다. 중요한 것은 그 정보를 나뿐만 아니라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소유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독자의 머리에 상상의 공동체를 상정하고, 그 자신을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낀다. 책이 발명되었지만, 오랫동안 책의 독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대중매체가 되면서, 거리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가정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대중매체에 실린 내용은 누구나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셧선은 신문의 기능에 대한 평가를 ‘전달 모델’(transmission model)과 ‘의례 모델’(ritual model)로 구분했다. ‘전달 모델’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아이디어와 정보를 송신자에게서 수신자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의례 모델’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일체감을 형성하고 공동체가 가진 공동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기능을 한다고 본다.

“신문이 시장(市長)이 어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말해주면, 그 신문은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나 시장이 어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보도를 통해 신문은 동시에 독자에게 그가 살고 있는 도시 혹은 그가 살고 있는 곳에 가까이 위치한 도시와의 연결(connection)을 재확인시켜준다. 전달 모델에서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해 준다면, 의례 모델에서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19세기 미국에서 신문은 도시화의 가장 핵심적인 도구였다. 도시가 더 이상 면대면(face-to-face)의 공동체가 아닌 상황에서 신문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해 주었다는 것이 셧슨의 견해다.

신문이 오늘날과 같은 대중매체가 된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은 벤자민 데이(Benjamin Day)가 1센트의 가격으로 <뉴욕 선>(The New York Sun)을 발행하기 시작한 1833년 9월 3일이다. 데이는 “모든 이들이 구독할 수 있는 가격으로 그날 그날의 모든 뉴스를 공중에게 제공해 주고 아울러 광고주에게 이익이 되는 미디어로써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자기 목적을 밝혔다.(알철, 1991: 82에서 재인용).
여기서 말하는 “모든 뉴스”의 대부분은 오늘날 언론계에서 “인간적 흥미기사”로 통칭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선>지 창간호의 기사는 이란인 선장에 관한 이야기, ‘10월의 정오’라는 시와 아주 사소한 문제에 대한 우스개 소리를 다룬 글, 경찰 즉결심판소에서 벌어졌던 사건, 짤막한 이야기 거리가 대부분이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도 1-2페니 가격으로 신문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이 중 하나인 라는 주간 신문 발행인은 1834년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우리 신문은 한 주일 동안 일어나는 모든 소중한 세상 이야기들, 재미있고 웃음을 주는 뉴스와 사건들을 기록하는 저장고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문에는 경찰 정보, 살인, 강간, 자살, 화재, 상해, 연극, 인종, 권투를 비롯하여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로 넘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 신문은 상업성이 있는 모든 종류의 나쁜 소식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선>이 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정당의 기관지라고 볼 수 있는 정당지와 선박 입출항 소식, 상품 가격 시세표와 같이 상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경제지의 두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1833년 당시 미국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높았던 뉴욕의 의 발행부수가 4천5백부였다. 당시 뉴욕 인구는 20만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인구 2백만의 런던에서 발행되던, 당시 가장 지배적인 신문이었던 <타임즈>도 1830년 당시 하루 1만부가 판매되었다. 이에 비해 <선>은 4개월만에 하루 5천부를, 2년 후에는 하루 1만5천부를 팔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값싸고 대중적인 <선>의 전략은 뉴욕과 다른 도시의 신문에게로 퍼져나갔다

<뉴욕 선>이나 <투 페니 디스패취>가 다루었거나 다루겠다고 약속한 내용, 그리고 그 이후 이른바 황색 저널리즘으로 발전한 신문들이 추구한 모델에 가까운 것이 오늘날 한국 신문에서는 사건과 사고, 법조, 휴먼 스토리, 진기한 일 등이다.

벤자민 데이를 비롯한 페니 프레스의 발행인이 그것을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도시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 진기한 일, 인간적인 스토리들에 대한 보도는 당시 노동자층들에게 그들이 도시의 일원임을 인식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도시는 서로 다른 전통을 경험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 일종의 집합장과 같았다. 그 집합장이 하나의 ‘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공동체 의식’은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확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대중매체로 변신한 신문이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퓰리처(Joseph Pulitzer)의 <뉴욕 월드>(New York World)가 추구한 오락성과 ‘스토리’ 저널리즘’은 독자들에게 미학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한 국가, 마을, 혹은 계층을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한다”. ‘스토리 저널리즘’은 보다 넓은 독자층을 겨냥하여, 도시인들의 변화하는 경험과 욕구에 응답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신문이 보다 오락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이 newspaper이기 보다는 ‘use-paper’로, 각종 인종과 사회층들의 사람들이 뒤섞여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에서의 생존을 위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안내서로 그 기능을 확대한 것을 의미한다.

신문에서 삽화가 늘어나고 제목의 크기가 커진 것 또한 중산층의 새로운 생활양식과 이민 근로자층을 향한 접근을 의미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상의 생활과 근접한 보도들을 통해, 새로 유입된 도시민들이 그 도시와 자신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저널리즘에 제동을 걸며 ‘정보’ 저널리즘의 기준을 세운 것이 <뉴욕 타임즈>였다. <타임즈>(New York Times)와 같이 ‘인포메이션’을 강조하는 신문이 추구하는 모델은, 저널리즘의 기능을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타임즈>의 전략은, 도덕적 차별성이었다. <타임즈>는 <월드>와 같은 신문을 ‘황색’ 저널이라고 명명하고, 진정한 의미의 저널리즘이 아니라고 폄하했다. 셧슨에 따르면, 교육수준이 높고 부유한 층이나 그러한 계층으로의 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이 <타임즈>를 선호한 것은 그 신문이 담고 있는 내용의 유익성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신문이 가진 사회적 인정 때문이었다. 오늘날 <타임즈>와 같은 이른바 고급지가 저널리즘의 표준이 되었다.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는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것은 사회적 일체성(solidarity) 혹은 통합(integration)의 문제이다. 근대화의 과정은 사적 영역이 공공화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polis는 국가이며 동시에 사회를 의미했고, oikos는 사적 영역으로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제외된 부분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polis는 이상적인 측면과 –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 모순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polis에서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동체의 일(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열린 사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회는 닫힌 사회다. polis에서 누리는 자유는 일부 시민들에게만 허용되고 여자, 어린이 그리고 특히 노예들은 이러한 자유에서 제외되었다. 자유롭고 빛나는 polis는 전제적이며 암울한 가정을 깔고 앉아있어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유럽 중세에서 고대 그리스의 시민이 차지했던 위상은 귀족들에 의해 대치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로운 시민들이 ‘정치’를 담당하고, 이와는 엄격히 분리된 가정이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생산 활동을 담당한 것과 같이 중세 유럽에서는 자유롭고 자주적인, 그렇기 때문에 상호계약을 맺을 수 있는 귀족들이 정치 활동을 한 반면, 부자유한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재화의 생산을 담당했다.

근대화는 공적인 영역의 정치와 사적인 영역의 생산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이다.
공적으로 중요해진 일반 시민들의 사적영역에서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에서는, 신분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다수의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모여 ‘군중’이 되거나 서로 관계없이 떨어진 원자(原子)화된 존재로 전락될 위험에 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묶어서 ‘공중’으로 만든 것이 대중매체이다.

대중매체가 시의성(currency)을 가진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도 근대성의 형성에 중요한 기능을 했다. 서구에서 근대를 나타내는 단어인 modern의 라틴어 원형은 ‘새로운’ 혹은 ‘새로운 시간’ 이라는 의미의 modernus이다. 우리가 사는 현재를 지칭하는 말을 ‘새로운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전과는 다른 역사의식을 나타낸다.

저널리즘이란?

저널리즘은 가장 기본적으로 ‘독자와 시청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으로 저널리즘을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다 민주주의 이론적 지향성을 더할 수 있다.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는 “저널리즘의 기본 목적은 시민들에게 그들이 자유롭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자유롭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free and self-governing)데 필요한 정보를 저널리즘의 기본 목적으로 정의한 것이, 단순히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정보의 전달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한정된 활동이 아니다.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진 저널리즘은, 사회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요소였으며, 동시에 근대화와 함께 생성․발전되었다.

계몽의 핵심이 종교와 전통 등에 기반을 둔 권력체제에 대한 인간 해방이었고, 근대화가 그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저널리즘이 인간의 자유와 자기 주체성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것으로 저널리즘의 특성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니다. 셧슨(Michael Schudson)은 ‘뉴스의 사회학’의 서두에서 저널리즘을 “일반 공공의 관심과 중요성을 담은 최신의 사안들에 대한 정보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사업 혹은 활동”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정보를 제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능만으로는 저널리즘을 “시, 백과사전, 사용설명서, 포르노그라피, 보이스카웃 핸드북”과 구분하기 힘들다.

셧슨에 따르면, 저널리즘을 수행하는 언론사는 새로 발생한 사안에 대한 정보와 해석/논평(commentary)을 ‘정기적으로(통상적으로 매일)’ 공표하며, 그 내용을 보통은 ‘진실(true)하며 진지한(sincere)한’ 것이라고 제시한다. 또한 저널리즘은 이를 통해 수용자를 ‘공공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논의’에 포함시키는 역할을 한다.

진실하며 진지하다는 것은 저널리즘의 객관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시와 소설, 연극과 같은 문예작품들도 독자의 삶의 문제와 관련되는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저널리즘과 다른 점은 이러한 문예 작품이 제시하는 내용이 반드시 ‘진실’하거나 진지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픽션이나 풍자, 과장, 함축 등의 방법이 용인되며 요구된다. 하지만 저널리즘은 확인된 사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견해, 그리고 그 사회가 사실 전달의 방식으로 용인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공공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논의에 수용자를 포함시키는 저널리즘의 역할은 중요성 혹은 연관성(relevance)에 대한 문제이다. 모든 정보를 여과없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수용자의 삶에 중요한 문제를 선택해서 전달해 줄 것을 저널리즘에 기대한다.

정기적이라는 것은 독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을 시사한다. 저널리즘은 특이한 일이 발생했을 때 혹은 무엇인가 ‘갑자기’ 할 말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저널리즘은 예를 들면 책이나 영화 등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법과는 다르다.

저널리즘의 기본 윤리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생활을 영위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사회의 다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론 활동의 기본 내용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언론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으며, 사회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언론인의 직업 활동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행위이다.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조건은 진실성이다. 이것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결과적으로 진실이라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의미가 없듯이, 일단 진실을 말할 것이라는 가정이 있어야 커뮤니케이션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진실(truth)과 진실성(truthfulness)은 다른 개념이다. 하르트만은 그 차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실과 진실성은 같지 않다. 둘 다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도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후자뿐이다. 진실은 생각한 것(혹은 그렇게 확신하는 것)과 존재하는 현상이 객관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 진실성은 이에 비해 말한 것과 생각 (혹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일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람의 권한 안에 속하며 그렇게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과 진실성이 무관한 것은 아니다. 진실성은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가 진실을 알게 되길 원한다. 객관적인 진실의 가능성을 전재하지 않는다면, 진실성은 의미가 없어진다. 미트(Dietmar Mieth)는 진실성이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규범이라는 근거를 아래와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예외가 규칙에 대한 간접적 인정이다. 거짓말을 용인하는 경우도 있고, 거짓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사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정당성의 의무가 주어진다.

둘째, 상호 인정의 원칙이다. 사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를 상호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상호 인정과 존중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함께 대화하는 대상이 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칸트의 경우 거짓말은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손상이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에 비추어 보면, 어떤 곤란한 경우를 피하기 위해 혹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인간 생존의 전략적 필요에 의해서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관계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트는 진실성의 내용은 ‘무엇이 진실이다’는 방식의 긍정적 접근보다는, 진실성 의무에 대한 죄(sins)를 통한 부정적 접근을 통해 분명해 진다고 보았다. 그는 진실성 의무에 대한 죄의 예로 기만(falsification), 은폐(concealment), 확언, 강요, 과장을 들었다.

  1.  은폐/감춤
    어떤 사실을 생략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 나에게 중요한 사안과 관련되는 모든 정보를 알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나도 남에게 (내가 자의로 판단해서) 어떤 부분을 감출 권한이 없다.
  2.  기만/거짓말
    올 바른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이것은 은폐와는 다른 것으로, 적극성을 내포한다.
  3. 확언
    어떤 사실(사실관계)이 실증적으로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장한다. (저널리즘에서는 흔히 은폐된 방법으로)
  4.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요                                                                                                            사적 영역, 부끄러운 부분에 대한 보호를 무시하고 어떤 진술을 강요하는 것칸트: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진술을 강요받고, 내가 진술한 것이 불법적으로 악용될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라.
  5.  과정 혹은 극화
    내용 자체는 사실에 부합하지만, 서술 형태를 통해 실제와 다른 인상을 전달한다면 이 역시 속이는 행위에 속한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언론인에게는 진실성이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인은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사실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진실을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된 사실을 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언론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윌리암스(Bernard Williams)는 진실과 진실성의 기원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에서 진실성이 단순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감춤이나 왜곡 없이)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공동체의 생활에 필요한 진실의 덕목은 진정성과 정확성이다. 즉, 자기가 아는 것을 “꾸밈 없고 직접적이며 적절하게 표현하는” 진정성(sincerity)과 함께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이 포함된다.

나는 진정성과 정확성 외에도 진실성의 한 덕목으로 신중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중성은 우리가 진실을 추구하지만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성찰이다. 이러한 성찰에서 나온 또 하나의 덕목은 투명성이다. 투명성은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내용과 함께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전달하는 것이다. 즉, 어떤 과정을 통해 누구로부터 그 정보를 얻고, 어떻게 검증했는가를 함께 밝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코바치와 로젠스틸은 앞서 소개한 책에서 아래와 같은 검증의 원칙을 제시했다.

1) 존재하지 않는 것을 덧붙이지 말라.
2) 독자/시청자를 속이지 말라.
3) 방법과 동기에 관해 가능한 투명하라.
4) 자신의 독창적인 보도에 의지하라.
5) 겸허하라.

정파성과 저널리즘

‘정파성’이 한국 언론의 중대한 결함으로 지적되고 있다.

▲ 이재경은 한국 저널리즘이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를 “언론사가 정파적 입장을 견지하며 보도대상 사실을 선택적으로 포함시키거나 배제하는 편집관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세상에 ‘진보적 사실’과 ‘보수적 사실’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사회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현실인식”이 불가능하게 되어 “현실에 대한 논리적 토론”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 남재일은 “바람직한 언론의 정치성이 일관된 정치적 관점을 갖고 기본적인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면, 현재의 정파성은 정치철학에 기초한 일관된 관점의 결과가 아니라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라고 보았다.

▲ 강명구는 언론이 1987년 이후 지배질서의 변화과정에서 강한 사회적 권력을 획득한 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일에 더 몰두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축구중계를 해야 할 언론이 선수들의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게임을 하면서 중계까지 하는 형국”이라고 비유하며 이는 정치적 냉소와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정파성’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 다양성은 민주주의 사회와 언론의 중요한 덕목이다. 다양성은 서로 다른 목소리가 병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 정파적인 다수의 언론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며, 더 현실적이다.

▲ 언론은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자와 약자의 편의 중간에 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언론은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적극적으로 대변해야 한다.

한국 언론의 ‘정파성’에 대한 언론학자들의 비판과 ‘정파성’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현장 기자들의 주장에서 정파성에 대한 정의가 각각 다를 수 있다. 언론의 정파성이 정당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란이 정파성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거나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해서 생길 수도 있다.

정파성은 가치, 경험, 지식, 사회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려를 통해 형성된 사회구조(권력구조, 경제적 분배구조 등)와 그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 사안에 대한 상대적으로 일관된 입장과 태도를 말한다.

언론의 정파성은 크게 ‘정당한 정파성’과 ‘정당하지 못한 정파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아래와 같다.

▲ 언론사가 가진 정파적 경향성은
– 어떤 사안(events 및 현상)을 어떤 비중으로 보도할 것인가(뉴스 가치)
– 그 사안에 포함된 많은 사실과 사실관계 중 어떤 사실(facts)과 사실관계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고려는 정당한 정파성의 범위에 포함된다.

▲ 사안의 발생과 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필요한 사실 및 사실관계를 조합해서 보도하는 경우(이른바 ‘스트레이트 보도’), ‘일반상식적인 판단’(혹은 ‘사회통념적’인)에서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사실과 사실관계(때와 장소 및 행위주체, 직접적인 선행사건, 상반되는 입장, 상반되는 주장,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사실관계 등)가 정파적 경향성 때문에 기사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이 경우는 정당한 정파성의 범위를 넘게 된다.

▲ 사안에 포함된 사실을 보도에서 정파적 경향성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제시(거짓)하거나 사실관계(인과관계 등)를 일반상식적 판단과 다르게 제시(왜곡)하거나 충분한 근거나 확인 없이 제시(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제시는 커뮤니케이션 윤리의 핵심인 진실 추구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정당하지 못한 정파성이다.

▲ 인과관계나 상관관계에 대해 상반된 견해들이 각각 일반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정파적 경향성 때문에 이 중 한 견해 혹은 일부 견해만을 적용해서 서술(은폐)해서는 안 된다. 왜곡과 단정이 명시적이지 않더라도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표현으로 읽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일 것을 의도하거나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그를 해소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경우(‘미필적 고의’)도 마찬가지다. 진실 추구는 상대가 진실을 알기 원하는 태도를 말하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커뮤니케이션 윤리의 핵심인 진실 추구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정파성은 정당하지 못하다.

▲ 사안에 대한 평가(evaluation)에서 정파적 경향성으로 인해 가치나 선호(preference)를 적용해서 서술하는 것이 허용되며, 복합적인 사안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추정이 가능하며 이 경우 언어적으로 그것이 필자의 가치나 선호, 추정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지 못하다.

언론 현실에서 정파성의 정당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기 힘들다. 언론이 한 쪽 편만을 드는 것이 정당한 정파성의 영역에 속할 수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가에 따라 그 영역을 벗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헌신과 이를 지키는 조건의 하나인 독립성이다. 저널리즘이 프로파간다와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특징이다. 즉, 독자를 특정 방향으로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독자를 특정 방향으로 조정하기 위해서 사실을 은폐하거나 일부 사실만 말하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경우, 그리고 그 목적이 특정한 정치 세력이나 집단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거나 특정한 행동을 촉발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가 진실을 알기 원하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멘체서터 가디언의 편집자 C. P. Scott: 논평은 자유롭지만 사실은 신성하다.

정파성을 버리려는 방식의 저널리즘도 가능하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덜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과 미국의 미디어를 비교 연구한 할린(D.C. Hallin)과 만치니(P. Mancini)는 정파적 신문보다는 중간자적 태보로 보도하는 신문이 더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고 시장에서 더 성공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비정파성은 단순히 정파적인 태도를 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정파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파적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뉴스 선정에서 기자 개인이나 편집국 구성원의 정파적 성향이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제도를 마련할 수 있다. 특정 사건의 보도에서 정파적 태도가 작용해 특정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닌가를 점검하고 다양한 측면이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 평가에서도 다양한 평가 가능성을 가능한 모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정당한 정파성, 정당하지 않은 정파성, 비정파성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결론: 위기의 저널리즘

새로운 뉴스 미디어가 생겨났고 앞으로 생겨날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잡지에 이어 인터넷이 가장 중요한 뉴스 미디어의 하나로 부상했고, DMB와 같은 모바일 미디어, 인터넷 기반의 IPTV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휴대 전화를 통한 모바일 뉴스 전송도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존의 킨들과 같은 E-Book도 실험되고 있다.

뉴스 미디어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뉴스의 공급자도 엄청나게 늘고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뉴스 공급자가 생겨나고 있다. 인터넷에서 오마이뉴스와 같은 대안 미디어들이 생겨났고, 한국 정치에서 한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경제 정보를 제공하는 한국의 이데일리나 머니투데이 같은 인터넷 신문은 이제 한국 저널리즘 일상에서 중요한 주체의 하나가 되었다. 이 외에도 IT 정보, 의학 정보, 연예 정보를 제공하는 많은 수의 인터넷 미디어들이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와 같은 ‘개인 미디어’나 한국에서는 ‘카페’라고 불리는 소셜 미디어들도 새로운 정보의 공급과 사회 공론장의 기능 측면에서 그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새로운 뉴스 미디어의 출현, 뉴스 제공자의 다원화, 적극적인 커뮤니케이터로서 시민의 역할 변화 등이 체제 유지의 틀을 크게 넘기 힘들었던 전통 미디어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 현실은 아니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추적 역할을 부여받은 저널리즘의 사회적 자기 관찰 기능은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충족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이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역할이 요구된다.

▲ 선택: 저널리즘은 많은 정보 중에서 수용자의 삶에 중요하고 수용자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선택해 주어야 한다. 정보가 있다고 다 제공한다면, 저널리즘이 아니다.

▲ 검증: 또한 선택된 정보가 정확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누가 뭐라고 했다는 사실을 단순 전달하는 것으로 저널리즘이 그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니다.

▲ 설명: 저널리즘은 정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추가적인 정보와 배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그 사실들이 어떻게 연결되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석’해 주어야 한다.

▲ 탐사: 저널리즘은 단순히 드러나 사실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사실, 누군가에 의해 은폐된 사실, 그리고 많은 사실들을 종합해야 알 수 있는 현상을 탐사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 신뢰와 권위: 사회공동체가 통합을 유지하고 환경 변화와 도전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지식을 생산하고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신뢰를 받는 저널리즘 기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 기관의 이러한 활동 기반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저널리즘 기관이 이른바 정보를 상품으로 하는 거대 미디어 산업의 한 하부 구조로 전락했다. 미디어 산업에서는 경쟁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디어 기관의 활동 조건이 양질의 저널리즘 콘텐트를 생산하는데 점차 불리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저널리스트에게 멀티미디어 콘텐트 생산이 요구된다. 많은 저널리즘 기관들이 인력을 줄여 경영 효율화를 추구하게 되어, 현장 취재와 검증에 충분한 인력과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또한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탐사보도의 공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어려운 경영 현실에 대한 대응은 저널리즘 기관이 수용자의 신뢰를 쌓고 권위를 확보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저널리즘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경향에서 개별 저널리즘 기관과 저널리스트가 할 수 있는 여지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 기관이 생존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에서 어떻게 저널리즘 기본 원칙에 더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는 개별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 기관이 판단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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