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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연해주 신한촌에서 맞는 68주년 광복절

– 선조들의 넋을 기리는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문 앞에서

[블라디보스톡=마이코리안] 김택용 기자 = 68주년 광복절을 맞아 주간미시간/마이코리안이 독립군들이 활동하던 현장을 찾아 특별 기획 취재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그리고 이르크츠크를 둘러 한민족이 태동한 바이칼호수 알혼섬을 찾았다.

광복은 이제 단순히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한민족이 진정 누구인가를 알아내려는 시도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한 때 대륙을 호령했던 한민족의 기상이 한반도에만 머물러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더우기 남북분단과 남남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는 민족 정신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할 후세들에게 주는 제한성은 전국민은 물론 해외동포들도 타파해야할 공동 장애물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몽고 북단 이르크츠크까지 70여 시간의 러시아 대륙 횡단 철도에 올랐다. 선조들이 다스렸던 그 땅을 직접 보기 위해서다. 또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는 한민족의 흔적을 찾아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40분을 날아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 여권을 건네받은 이민국 직원의 근엄한 얼굴과 견장에 달린 붉은 별에서 구소련의 차가운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극동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고 연해주의 행정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이다. 인구는 약 70만, 디트로이트와 비슷하다. 이곳에서 모스크바까지 장장 9,288 킬로를 달리면 지구의 1/3을 횡단한 셈이다.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있는 이곳은 과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선조들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경원선이 열리면 부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곳까지 올 수 있지만 지금은 북한이 가로막고 있어 인천에서 비행기나 속초에서 배를 타고 이곳에 올 수 있다.

길거리에 보이는 거의 모든 승용차들은 일본산이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것들은 중고차를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공공 버스는 현대, 기아가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버스에 한글 싸인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한국에서 쓰다가 들여온 것 같다. 10여년 전 한국에서 쓰이던 것들이 이곳에서 재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얼마전 파산보호 신청에 들어간 디트로이트보다 더 헝크러진 모습이다. 도로 정비나 조경이 산만해 보인다. 일단 대부분의 도로에 신호등이 없다. 그래서 눈치것 차를 먼저 들여밀지 않으면 계속 기다려야 한다.

거리는 우중충한 편이다. 몇년 전 다녀 온 개성 시가보다는 훨씬 화려하지만 미국의 그 어떤 곳에도 이런 도시는 없을 것 같다. 눈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차들이 세차를 한 번도 안한 것처럼 지저분하다. 무채색이 주도하고 있는 이 도시를 수채화로 그리면 회색 물감이 가장 먼저 닳아 버릴 것 같다. 하지만 눈을 의심하리 만큼 신기한 것은 거리를 다니는 러시아의 여인들은 마치 패션쇼 런웨이를 걸어 나오는 모델들 같다. 늘씬한 몸매와 백옥같은 피부는 마치 이곳에 즐비한 자작나무를 보는것 같다. 늘씬한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은 러시안 여인들을 상징한다. 젊은 여인들은 다 쭉쭉빵빵인데 나이가 든 아줌마들은 모두 뚱뚱빵빵이다. 모스크바지역보다는 극동지역에 있는 여인들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윤택해 보이지 않는 이곳에 남다른 정이가는 것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졌던 열사들의 숨결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종의 특명을 받고 헤이그로 떠나는 이준 열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탔다. 그리고 오늘 필자처럼 이 철로를 달렸을 것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에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을까? 나라의 운명을 짋어진 그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시베리아 들판을 달리는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이다.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68년 전 조국의 해방소식을 들은 독립운동가들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들의 덩실거리는 춤바람이 지금 들판을 나르는 저 새들의 날개짓보다 더 신명났을 것이 분명하다. 저 초원위에 살아 남아있는 독립투사들의 영령들이 왜 이제야 왔느냐고 꾸짖는것 같다.

1860년대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관리들의 학정에 시달려 연해주로 이주한다. 그후 1867년에는 999명, 1869년에는 대기근으로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1만여명이 이주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연해주 한인은 6만여명으로 늘어나다가 37년에는 그 수가 20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37년은 한인 동포들에게 고통의 해였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18만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던져졌다. 매서운 칼바람을 헤치며 40일동안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사막으로 강제 이동되었다. 기차안에는 화장실도 없었다.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린 아이들과 임산부, 노인등 수만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의 고통은 기차여행에서 끝나지않았다. 황무지에 버려진 그들은 첫해 겨울 천명 당 42명이 사망했고 유아의 20%도 목숨을 잃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신한촌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들은 구들장이 있는 한국식 집을 짖고 학교도 세우고 한글로 발행하는 신문도 만들면서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신한촌을 일제가 가만 둘리 없었다. 1920년 4월 4일 새벽 12시 20분, 일본 기병대가 습격을 가맹했다. 길목을 막고 한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한인 지도자 300명을 체포해 울리스만 바다에 수장했고 수많은 한인들을 한인학교에 가두고 불을 질러버렸다. 지금 신한촌은 없어졌지만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기위해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 위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놓고 영령들의 넋을 달랬다. 잊혀졌던 사람들의 한과 서러움을 달래고 싶었다.

1999년 8월 15일 한국 사단법인 해외한민족 연구소가 건립한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문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팔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발간, 13도의군 창설 등으로 민족 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서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해외 한민족연구소는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캐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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