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간 인터뷰 Special

플래처 일병, 흑인들도 한국을 위해 싸웠다

– [한국전 종전 60주년 특집]
– 흑인 참전 용사,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 한인들로부터 무시받을 때 마음 아퍼

[앤아버=주간미시간] 김택용 기자 = 오는 27일(토)은 한국전쟁이 종전된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7월 27일 총성이 멎은지 벌써 60년이 지난 것이다. 매년 미시간 디어본과 롸체스터 힐스 지역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이벤트들이 열리고 있다. 한인들도 참여하여 이들과 교류를 갖고 있지만 흑인 참전용사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쉽게 만난 사람들은 모두 백인 참전 용사들이었다.

한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국에 대한 오해도 풀게되어 홀가분하다는 플래처씨

하지만 한국전에서는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제24 보병연대가 있었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인종적 차별로 얼룩져있다. 1997년 미 육군 군사 편찬소가 발행한 ‘검은 병사, 흰 군대(Black Soildier, White Army)란 제목의 책자에는 이들에 대한 그릇된 시각이 들어나 있어 흑인 참전용사들의 항의를 받은 바 있다. 보병 24연대는 당시 다른 부대만큼 잘해냈으나 군기해이 등으로 미8군 소속 다른 부대들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 군대로 묘사돼있었던 것이다.

전장에서도 차별받은 흑인병사 로버트 플래처씨를 앤아버에서 만났다. 당시 입실런티에 살고 있던 그는 17세의 나이로 1950년 7월에 한국전에 투입된다. 그는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던 미 보병 24연대 혹인 병사중 하나였다.

9월 1일 까지 부산을 점렁하려 했던 북한군의 기세를 꺽은 것은 흑인 보병연대의 활약때문이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당시 일병이었던 그는 기관총사수와 함깨 북한군을 향해 무차별 총을 쐐댔다. 알지도 못하는 적군들이쓰러져기는 것을 보면서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총을 쏴야했던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왜 이런 싸움을 해야하는 지도 몰랐다. 왜 알지도 못히는 나라에 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방아쇠를 당길수 밖에 없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밀어 부친 연합군은중국군의 개입으로 고전하게된다. 24보병 연대도 11월 27일 알지도못하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중공군에게 완전 포위된다. 압록강으로부터 약 25-30마일 남쪽의 어느 곳이었다. 5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싸웠다. 마침내 총알도 다 써버리고 더 이상 싸울 기력도 남지 않았다. 영하 50도의 살을 에는 추위도 그들의 적이었다. 중공군과 달리 흑인병사들에게는 겨울 군복과 군화가 지급되지 않았다. 모두가 동상에 걸려 살이 썩어들어가는 병사가 한 둘이 아니었다. 플래처 일병의 상관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판단을하고 부하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더 싸우다가 죽을것인가 아니면 항복을 할것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들은 항복을 결정한다. 250명이 출동했으나 중공군에게 생포된 혹인병사는 139명 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혹인 보병 연대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었다.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미국의 언론들도 흑인 병사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고 플래처씨는 울분했다.

제24 혹인 보병 연대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로버트 플래쳐 씨

생포 당시 왼쪽 발목이 부러진 플래처 일병은 그 후로 33개월 동안포로 생활을 한다. 어디로 잡혀갔는지는 모른다. 중공군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치료약도 없었고 겨울 옷도 주지 않았다. 8개월동안 옥수수만 한끼씩 먹으며 추위와 싸워야 했다. 중공군은 가끔씩 본보기로 한명씩 불러내어 전우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했다. 오히려 장교들은 괴롭히지 않았다. 당시 린 이라는 중국계 미국 유학생이 통역관으로 자신들을 심문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플래처씨는 53년 8월 8일 남북포로 교환으로인해 석방된다. 그는 살아서 고향인 입실런티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 행복했다. 자유로운 몸으로 다시 사람의 대접을 받는 것이 너무 기뻣다. 귀국한 후 부상 후유증으로 5번의 다리 수술을 받았다. 아직도 오래 서있지 못하고 윌체어 신세를 져야한다. 오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밤에 자다가 소스라쳐 깨어 나면 아내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진정제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더욱 서러운 것은 흑인들에게는 참전 용사에게 주어지는 군인 연금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퇴역한지 30년이 지나서야 연금을 주기 시작했다. 퇴역 즉시 연금을 수령한 백인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앤아버 시 수도과에서 62세의 나이로 은퇴하고난 후 그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을 하며 잊을 수 있었던 한국전의 악몽들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전쟁 상처가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잊고 싶었던 과거의 아픔이 너무나 또렷해졌다. 그는여러번 자살을 시도했다. 정신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51년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아내와 5명의 자식들이 그의 고통을 분담해주었다. 가족이 없었다면 그는 혼자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한다.

생포시 다쳤던 발목이 33개월동안 방치되면서 부상이 깊어졌다. 미국에 온 후 양쪽 무릎을 5번이나 수술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다. 그는 한때 한국민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국전 당시 한국인들이 백인병사들을 대하는 것과 흑인 병사들을 대하는 것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흑인을 무조껀 피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너무나 화가났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씨워주어야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백인 병사들이 한국 여성들을 강간하면 대부분 용서가 되었지만 흑인 병사는 즉시 총살되었다. 사건 수로 보면 백인병사의 강간이 훨씬 많았지만 한국 여성들은 흑인들에게 더 많은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억울했다.

그는 미시간에 돌아온 이후에도 한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다고 회상했다. 한 한국식당에서 자신에게 서브하지 않으려고 피하는 한인 웨이트레스를 보고 그 식당을 돌아 나오면서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2000년에 자비로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 2010년에는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다시 찾은 바 있다. 그는 그가 보도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1950년에 처음 만났던 한국이 아니었다. 복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63빌딩 아래에서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가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희생의 결과가 이렇게 멋진 것이라는 점에 눈물이 났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보람스럽게 만들어준 한국 사람들이 고맙다고 전한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흑인 병사들도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앚지 말아달라고 전했다. 모두 자신들을 멸시해도 한국인들 만큼은 그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1942’년부터 1978년까지 디어본 시의 시장직을 지낸 오빌 허버드 시장은 ‘Keep Dearborn Clean’ 정책으로 악명높다 ‘Keep Dearborn Clean’은 곧 ‘Keep Dearborn White’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색 인종은 디어본에서 떠나라는 뜻이었다. 그런 차별정책을 펼친 그가 시장으로 롱런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뽑아준 시민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플래처 씨는 디어본에 있는 참전용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를 넌지시 암시했다. 혹인 병사들은 전장에서나 고향에서나 아직도 차별을 받고 있다고 속상해 했다.

그는 제24흑인 보병연대 로고가 새겨진 낡은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한국전에서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전우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떠나고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회 전우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는 그 티를 입는다.

그는 전쟁 후 받은 훈장을 보여 달라는 기자의 부탁도 거절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고 반문했다. 훈장이 달린 예복이나 사진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단다. 그것보다는 사람들이 내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미시간에 있는 한인커뮤니티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무엇을 해 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친구로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을 위해 싸웠던 흑인 병사들을 무시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는 24일(수)워싱턴 DC.로 떠난다. 한국전 최초 미혹인 전쟁포로었던 그는 지금 전미 참전용사회에서 전쟁포로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일년에 두번씩 펜티곤의 초청을 받고 워싱턴을 방문하는 그는 혹인 참전용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파트타임 잡으로 학생들을 위한 연설을하고 있는 플래처씨는 얼마전 앤아버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전에 대한 경험담을 들려준 뒤 한 한인 학생을 만났다. 그 학생은 한국전에서 남한이 승리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전쟁을 하면 모두가 패자가 될 수 밖에없다고 말한 그는 한반도에서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전쟁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전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범죄라고 전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전 종전 60주년을 맞는 이번 7월 27일에 한국인들을 포함한 전세계인들이 전쟁이 아닌 사랑과 평화를 더욱 앙망하는 마음을 갖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mkweekl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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