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16-17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다가 오순절 날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서 교회는 엄청난 속도를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막기 위하여 사탄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스테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무서운 핍박이 주어졌습니다. 훗날 바울이 되었던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갔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핍박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고, 사방으로 흩어진 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워 교회에 가해진 핍박은 오히려 교회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교회 하나 부흥하고 성장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안디옥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리도 잡기 전에 선교를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쓰려고 하지 않고 보다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 바로 초대교회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 때문에 복음은 정말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었고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복음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전해지면서 그 핍박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교회와 교인들은 그 핍박을 피해 지하묘지와 동굴로 숨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이 300년이나 로마에서 계속 되었지만 기독교는 끈질지게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313년 콘스탄틴 황제때 기독교가 공인을 받게 되고 얼마 후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는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었는데 중세 때에는 교회의 교황의 권력이 로마의 황제보다 강하여 실제로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황제의 권위와 권력이 높아지면서부터 교회는 오히려 부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섬김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의 목적이 세상을 섬김에 있지 아니하고 교회 자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교회에 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끝없는 욕심으로 교회와 교회의 권력을 키우는데만 급급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복음의 변질까지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사람들의 헌신을 더 강요하기 위하여 면죄부까지 발행하게 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복음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때 마틴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교황이 쩔쩔매는 권력을 가진 교회에 대항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당 정문에 못 박아 게시합니다. 루터는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생명을 걸었습니다. 오늘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한국교회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역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초대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매우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국채보상 운동을 비롯하여 명성황후의 시해와 같이 나라가 어렵고 위험할 때 선교사들이 황제를 보호하고 나서게 되어 기독교는 정부와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고종 황제께서 선교사들에게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시리만큼 당시 기독교는 정부와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황제의 제안을 선교사들이 거절합니다. 그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하였습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교회사를 통하여 배웠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한국의 국교가 되는 것을 선교사들이 반대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때 선교사들이 황제의 정부의 제안을 받아 들여 기독교를 국교로 했었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중세교회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실패보다 더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입니다. 실패하여 넘어지는 사람보다 성공한 후 넘어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그 넘어짐의 강도도 더 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300명 미만입니다. 100명 미만인 개척교회 수준인 교회들이 사실은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수 천 수 만 심지어는 수 십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도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교인과 목회자들의 꿈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이 교회에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의 지나친 성장이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앞에서 말씀드린 중세교회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소명 때문인 경우보다는 야망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 무조건 열심히 돈만 벌려고 하듯이 교회 성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만을 위하여 매진하는 교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장하는 대부분의 교회에는 그와 같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나친 교회의 성장은 교회 안에 지나친 권력을 만들어내고 그 지나친 권력들은 교회를 오만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교회의 오만성이 세상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쳐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게 되고 그와 같은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반감은 교회를 점점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지금 한국에 불어 닥치고 있는 안티기독교의 현상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개척 된 지 8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개척 된지 8년 만에 교회가 소속된 노회에서 가장 덩치가 큰 교회가 된 것 같습니다. 노회에 가면 회의록을 주는데 그 회의록을 보면 노회에 속한 모든 교회의 예산 규모가 적혀져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노회에 가서 회의록을 받아 들면 저는 그것부터 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몇 등인가를 봅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모든 노회원들이 그럴겁니다. 그리고 은근히 키 재기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한지 2년이 좀 지나면서 노회 안에서 2위권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제 관심은 언제 우리 교회가 일 등을 젖힐 수 있는가였습니다. 해마다 조금씩 그 격차가 줄어들더니 작년부터는 거의 비슷하게 되었고 올해 들어와 우리 교회가 그 어느 해 보다 많이 성장하였기 때문에 아마 올해를 기점으로 우리 교회가 제일 큰 교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끝입니다. 내년 봄 노회 때에는 정식으로 교회분립을 신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노회에서 제일 큰 교회라는 자랑이 없어지게 됩니다. 조금 섭섭합니다. 그런 유치함이 제게 있습니다. 섭섭하면서도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교회 분립을 통하여 그 쓸데없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제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교회가 그와 같은 경쟁에 빠져들어 끝없이 교회만 키우려고 한다면 우리 교회는 계속 건강한 교회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하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 교회는 건강한 개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의 분립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새 포도주는 언제나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계속 발효하기 때문에 낡은 부대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여 터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새 포도주 같습니다. 끊임 없이 발효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는 언제나 새 부대 같아야만 합니다. 성공과 성장에 안주하여 낡아지게 되면 포도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우리 교회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 부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새 부대의 축복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우리 높은 뜻 교회들에게 계속되기를 소원합니다.
성공과 성장에 안주하지 말고, 성공과 성장을 목표와 목적으로 삼지 말고 끊임없이 개혁하고 새로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성공과 성장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도구로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크고 귀한 사역을 위하여 쓸 줄 알고 사용할 줄 아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교회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성공과 성장의 노예가 되어 성공과 성장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과 성장은 그 자체로 궁극적인 삶의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성공과 성장은 절대로 그 자체로 궁극적인 삶의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성공과 성장을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주를 위하여 사용하였듯이 성공과 성장을 로마시민권과 같이 쓴다면 성공과 성장도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성공을 가르치고 성장을 권면합니다. 고지를 정복하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축복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공과 성장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줄 알고 집착하게 되면 교회든 교인이든 누구나 다 어리석어 집니다. 그리고 부패하게 됩니다. 그 성공과 성장이 패망의 인자가 될 것입니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어 버릴까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그래서 늘 불행합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개혁입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보수입니다. 저들은 진리의 보수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진리를 보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공적인 삶과 자리를 보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부터 저들은 몰락합니다. 추해집니다. 불행해 집니다.
그것은 개혁을 내세우는 소위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의 개혁은 진리를 위한 개혁이기 보다 보수주의자들의 성공한 자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참 찾아 보기 여렵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보면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다 보수주의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리와 사상에 얼마나 집착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는지 모릅니다.
진보도 개혁해야하고 보수도 개혁하여야만 합니다. 진보주의자도 늘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하고 보수주의자도 늘 새 부대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진보주의자가 늘 자신을 개혁하려고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주의가 될 것입니다. 보수주의자가 늘 자신을 개혁하려고 새 부대를 준비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보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서로 자신을 개혁하려고 힘쓰다보면 서로 만나게 되는 중간지점이 생길 것입니다. 거기서 진보와 보수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도 꼴통이 되고 진보도 꼴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그리고 귀하게 쓰신 사람들을 보면 개혁주의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을 개척하였습니다. 조상 대대 내려온 성공과 안정을 보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머물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자기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뒤 엣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자리 펴고 누워 있어야 할 나이에 여호수아에게 산지를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입니다. 젊은이들도 두려워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던, 정복하려고 하지 않았던 산지에 도전하였던 사람입니다.
저들은 모두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성취한 성공과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그 때문에 부패하지 않고 그것들을 잘 사용하여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세교회가 국교가 된 것은 결과적으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많은 대형교회들의 성장과 성공은 결과적으로 우리 한국과 한국교회의 축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교와 성장과 성공에 발목 잡혀 그것을 탐닉하다가 교회 본연의 사명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워 져야만 하는 사명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늘 새로워져 개혁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