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5일 주일 예배 설교(한인 제일 장로교회)

본 문: 열왕기상 12:25절-33절
제 목: 여로보암의 실책
- 집이나 건물을 세울 때 가장 신경을 써서 해야 하는 일은 “기초”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기초가 약하거나 부실하면 건물은 약간의 충격에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기초”를 견고하게 세운다는 것은 단지 집이나 건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기를 충실하게 배우지 아니하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고, 가정이나 국가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때 그 가정의 기초를 세우는 것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가정을 건강하고 화목하게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자식들은 부모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합니다. 부모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자식들이 책에 관심을 갖고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역사가 200년이 조금 지났는데, 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주로 영국에서 이주에 온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라의 기초를 올바로 세우려고 노력한 결과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세계를 움직이고 있고, 민주주의를 세워가는 일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현대사, 즉 일본의 압제 아래서 해방된 다음의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 나라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해방 이후, 나라를 세웠던 사람들이 소위 말해서 친일세력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계속해서 힘들게 되었다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웠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정신과 신앙의 내용과 교회를 섬기는 모습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떤 원칙을 갖고 교회의 일을 결정해 왔는가 하는 것이 그 이후의 교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잘못된 기초를 세움에 따라서 그 이후의 역사가 얼마나 비극적인 역사로 발전 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로보암은 북쪽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솔로몬과 그 아들 르호보암의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통일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집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이 다스리던 때에 건설 현장의 책임자였습니다. 여로보암이 힘도 좋고 야물 딱지게 일을 잘하는 것을 보고 솔로몬이 현장 책임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솔로몬의 우상숭배가 심해진 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두 개의 나라로 쪼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해서 아히야란 선지자를 보내서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결정을 알려주었습니다.
- 선지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을 만나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습니다. 그리고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손에서 열 지파를 빼앗아 너에게 줄 것이요, 너를 그 나라의 왕으로 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온갖 가증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내던졌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다윗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를 지켜 행하며,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길을 따라서 걸으며, 하나님의 눈에 합당하게 행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함께 한 것같이 너와도 함께 하여 네 왕국과 왕위를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결정을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솔로몬이 알고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가서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애굽에 있다가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로 오게 됩니다. 그 이후에 르호보암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서 나라는 두 개로 갈라지고 여로보암은 북쪽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됩니다.
- 여로보암이 왕이 된 다음 첫 번째로 한 일은 에브라임 땅에 세겜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습니다. 그리고 부느엘이라는 도시도 건설합니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당시 나라는 두 개로 나뉘어졌지만 하나님의 성전은 남쪽 유다 땅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라면 누구나 일 년에 세 차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 세 절기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절기 때만 되면 백성들은 남쪽으로 모두 내려가야만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나뉘어졌지만 종교적으로 하나인 상태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얼마 전까지 하나였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종교가 핵심인 나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믿음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심령 속에는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남쪽 유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왜 우리가 나뉘어서 살아야 하나?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처럼 통일된 나라가 되어서 영광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누구를 중심으로 모아져야 하겠는가? 아무래도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쪽 유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될 경우에 남쪽 유대의 왕인 르호보암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 이것이 바로 북쪽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크나큰 정치적인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꼼수를 씁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북쪽 이스라엘에도 예루살렘에 걸 맞는 성전 혹은 무슨 상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여로보암이 생각해 낸 것이 남쪽 유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벧엘과 북쪽에 있는 단이라는 곳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이 금송아지가 바로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선전을 했습니다. 선전만 한다고 백성들이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문과 방송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광고를 합니다. 왜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인가 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세뇌를 시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섬길 때 나라가 떠들썩 하도록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속된 표현으로 뻑 가도록 만들어버립니다.
- 그뿐 만이 아닙니다. 산마다 신전들을 만들고 레위 자손이 아닌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삼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 교육도 받지 아니하고, 정식 과정을 거쳐서 안수를 받지 않은 무자격한 목회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목사로 세워서 목회를 하도록 만듭니다. 나라에서 풍족하리만큼 월급도 주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금송아지가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인가를 떠버리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금송아지를 섬기도록 아주 그럴듯한 제사의 형식을 만듭니다. 그 제사에 참석하기만 하면 감동을 먹고, 기쁨을 누리도록 만듭니다. 온갖 음악과 춤을 동원하고, 풍성한 음식을 제공해서 사람들의 혼을 빼놓습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이 매우 교묘한 것은 유대의 초막절이 7월 15일입니다. 그런데 그 절기와 비슷한 형식을 갖추어서 한 달 뒤인 8월 15일에 벧엘과 단에 가서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열왕기상을 기록한 역사가는 오늘 본문 말씀 30절에서 “이 일이 죄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 구절이 바로 여로보암과 그가 다스렸던 북 이스라엘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 나라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그는 솔로몬 왕이 다스렸던 시대가 왜 망하게 되었는가? 통일 이스라엘이 왜 둘로 쪼개지는 비극적인 역사를 만들어내었는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결정과 뜻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그의 나라가 영구하리라는 보장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 여로보암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이스라엘을 바르게 통치할 수 없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어떤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이 그런 무서운 죄악을 범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윗처럼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계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이 망한 이유도 알고 있었고, 나라가 솔로몬의 우상숭배 때문에 쪼개졌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신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자기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가 솔로몬이 망한 길을 그대로 걸어가게 되었을까요?
10.심리적인 요인을 말하자면 “불안감”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다 보면 반드시 자기를 죽이고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26절이 그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실제적으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서 자기 스스로 불안감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11.우리들이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 과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그 문제가 큰 문제일 수 있고, 아무 것도 아닌 문제일 수 있습니다.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문제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상상력을 발동해서 그 문제들을 더 큰 문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실제는 작은 문제인데 우리들의 상상의 세계 안에서는 너무나 큰 문제로 발전을 합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 속에서 온갖 문제란 문제는 모두 만들어서 그것이 사실인양 생각합니다. 스스로 체면을 거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문제가 다는 아닐 것이야! 이런 문제들도 일어날 것이고, 저런 문제들도 터지겠지? 자신이 상상해서 만든 문제들이 너무나 커 보여서 자기 혼자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생각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입니다. 사단은 그런 우리들의 연약한 마음과 상상력을 붙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꼼짝 달싹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 첫 걸음이었습니다.
12.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만나거든 먼저 불안해 하거나, 떨지 마십시오. 문제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경험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를 만났을 당시에는 죽을 것 같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최악의 상태처럼 느껴집니다. 사방이 꽉 막혀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지나고 돌아보면 힘들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최악,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지내온 우리들의 삶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절망적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독가스 실에서 죽어갈 때와 같은 그 상황에 우리가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런 희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13.그러나 여러분, 절망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처해 있는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 위젤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 작가로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쓴 “밤”이라는 소설은 대단히 유명한 소설입니다. 그는 2차 대전 중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는데 자기 부모님과 누나가 모두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가족들이 죽은 것보다 엘리 위젤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은 기억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13살 정도 되는 아이가 수용소에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서 모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30분 동안 교수대에 매달려서 몸부림치며 서서히 죽어가는 그 어린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때 엘리 위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가슴 속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자기 안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나는 저 소년과 함께 저 교수대에 매달려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엘리 위젤은 불란서 파리에 있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수아 모리악이라는 작가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모리악이라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타난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싶소—이 천 년 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그 분은 지금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시지요”
1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각하기를 만약 예수님께서 교수대에 매달려서 서서히 죽어가는 소년과 함께 계시다면 그 소년을 구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왜 그 상황 속에서 그 소년을 구해주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죽음 앞에서 어떤 믿음과 자세로 그 현실을 대면해야 할까요? “겁내지 않고 무서워 말고/그리스도인은 그가 처해 있는 곳에서 항상 자기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죽음이 그를 지쳐 버리게 할지라도/굳세고 착하고 고요하게 머물러야 한다/죽음은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수천의 곤궁으로부터 우리의 혼을 구원해서/쓰라린 고통의 문을 닫고/하늘나라의 기쁨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어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쓴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견딜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주십니다. 때로는 그 고통을 걷어주시고, 그 아픔을 바꾸어서 기쁨으로 만들어주십니다. 때로는 그 고통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도록 우리를 기쁨의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15.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상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당한 문제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크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큰 고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염려하고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장에서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쓸데 없는 상상력으로 여로보암처럼 스스로 올무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스스로 올무에 빠져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일인 양 생각해서 불안에 빠졌습니다. 불안에 빠진 그 심령이 결국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행한 것이 배교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종교를 우상의 종교로 바꾼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격도 없는 제사장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제정한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바꾸었습니다. 자기만 올무에 빠진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16.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정책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르호보암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죄로 인해서 여로보암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자기도 죽었습니다. 그 집안이 망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그 죄의 전통이 대대로 이어져서 북쪽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서 역성혁명, 쿠데타가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역사가들은 왕이 죄를 지어서 죽을 때마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 여로보암이 지은 죄를 그가 지었다”여로보암이 “기초”를 잘못 세웠기 때문에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왕들은 그의 길을 따랐습니다.
17.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여로보암의 죄악의 절정이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렸던 시대였습니다. 극에 달한 죄악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북쪽 이스라엘은 결국 724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은총을 망각하고 자신이 생각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떠난 결정과 사업을 행한 결과, 그것이 북쪽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아서 결국 그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는 그 죄악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놀라운 것은 북쪽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들 가운에서 여로보암의 죄악을 떠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서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죄가 쌓이면 쌓일수록 거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죄를 털어내고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것이 사는 길인데 그 길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무지하고 완고해서 사망의 길, 멸망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18.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어떤 모습을 만들어 왔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로, 생명과 진리의 길로 걸어가기로 결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우리 가정과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가족 가운데 무지해서, 완고해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고, 알면서도 자기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목놓아 울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자신만 살라고 이 땅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이, 생명과 진리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수고하고 헌신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요, 그렇게 될 때 올바른 기초가 다시 쌓여지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우리 가정, 우리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될 그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없는 문제까지 끄집어 내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내 생각 가운데는 세속적인 생각은 없는가? 우리 가정, 우리 자식들은 믿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믿음 가운데 살아간다고 해도,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는가? 를 돌아보고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 결정들, 우리들의 말과 행동들이 과연 올바른 기초와 전통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고 있는가? 를 늘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9.조지 산타야나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망각하면 그 과거를 반복하는 형벌에 처해진다”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로보암의 죄, 여로보암의 배반, 여로보암의 실책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한 교훈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하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도 여로보암이 갔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진리의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생명의 길에서 이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사는 길이 아닙니다. 죽어도 생명의 길에서 죽어야 합니다. 망해도 진리의 길에서 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사는 길입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통을 바르게 세우는 길이요, 앞으로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한 교회를 위한 길입니다.
20.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기십시오. 작다고 무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로보암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고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이 있다면 점점 커져서 울창한 나무가 될 것입니다. 많은 새들이 놀러 오게 될 것이요, 피곤에 지친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사람마다 배부르게 될 것이요, 그 나무의 잎사귀는 약재로 쓰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21.우리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면 나머지는 모두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도리에 따라서 우리의 힘과 정성과 마음과 뜻을 모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 일과 헌금을 드리는 일, 교제하는 일에도 여러분들의 성심을 다하십시오. 지나가는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들이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들이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을 쌓으면 우리 말과 행동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성숙입니다. 요즈음 세상에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건강하고 인격적이고 올바르고 성숙한 사람을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논문을 표절해도, 동생의 아내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을 받아도 국회의원으로 뽑히는 시대입니다.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이 천박한 시대에 우리들마저도 시대의 풍조를 따라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2.감사한 것은 주일 예배에, 수요 성경공부에 지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전통이 되도록 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모이는 일에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미국 교회는 휴가철만 되면 교회의 문을 닫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되 관중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객으로 오신 분들이 아닙니다. 매 순간을 머리 숙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매 주일 예배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사모하며, 성도의 교제를 그리워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세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근본 관심이 되어야 하고,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23.두 번째는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인간적인 생각이나 말을 가지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교회가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조심하고, 신중하고, 열심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지만, 때로는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나오는 것이 우리들의 평상시에 갈고 닦은 영적 실력들 입니다. 평상시에는 경건하게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생각이나, 꼼수, 혈기, 고집, 비아냥거림, 없는 말을 지어냄, 이런 것들이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여로보암을 거울로 삼으십시오. 현실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여로보암은 솔로몬 시대의 역사와 교훈도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도 잊어버리고, 타락의 길로, 멸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 말씀대로 가야 합니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해 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남들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고,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든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할 만한 분명한 근거가 있다면 그 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형통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의 결국은 고난이요, 고생이요, 고통입니다.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까지 오염시키고, 타락시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른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2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가정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초와 전통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로보암이 갔던 길을 보았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의 종국, 그 결말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도 진실은 반드시 승리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편안함 때문에 진실의 길을 떠난다면 그 후의 역사가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그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후배들이 그 열매를 따먹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쌓아가고 있는 진실의 벽돌 한 장 한 장이, 순종의 걸음 걸음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견고한 기초를 세우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이 길 끝에서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그 주님으로부터 잘했단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 은총과 진리의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꿋꿋하게 걸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