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간관계의 적인 완벽주의를 극복하는 법

우리는 지난 시간에 완벽주의가 인간관계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완벽주의가 무엇인가? 완벽주의는 완전해 짐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영적 성숙의 모조품이다. 나는 목회를 하며 완벽주의가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을 보아왔다.
손경구 목사
완벽주의는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항상 잔소리를 하며, 항상 고쳐주며, 항상 곧아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하는 일을 항상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로 피곤한 일이다. 그 누구도 항상 곧아야 하고, 완전한 사람과 같이하려 하지 않는다. 실상은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항상 완벽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게 된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완벽주의는 항상 고쳐주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다른 사람에게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그러면 완벽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1. 완벽주의는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된다
요한 1서 3:1을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말씀한다. 여기 ‘자녀’라는 말씀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바치면 평생 동안 그분의 종으로 섬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도 못하고 묶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기 보다는 그 이상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고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아버지 내가 기도하는 대로 따라 하세요.”라고 말하며 아들이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형님”,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진데 왜 형님이라고 해요?”하니까, “이 녀석아 너한테 아버지면 나한테는 형님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도 손자에게도 아버지시다. 바로 여기에 차이점이 있다. 종은 그가 행한 것을 기준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자녀는 관계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종은 하루 종일 걱정하며 그의 일을 통해 주인을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녀는 가정에서 사랑 받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종은 그 생산력과 행함 때문에 용납이 된다. 그러나 자녀는 가정에서 그의 위치 때문에 용납이 된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종은 그의 일이 가치가 있다고 인정 될 때 평안을 누리지만 다음날 아침 다시 염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녀는 오늘도 내일도 그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 종은 실패하면 그 지위가 위태로워 진다. 그러나 자녀는 실수해도 가정에서 쫒겨 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녀가 가정에 속하고 사랑 받는 확신은 그의 행함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지위의 안정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자녀가 완전한가? 물론 아니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그들을 사랑하는가? 그렇다! 당신은 자녀를 끔직히 사랑한다. 그들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두 세 살 난 아이가 삐뚤 빼뚤 ‘아빠’라는 글자를 그려서 가져왔다. 당신은 뭐라고 하는가?
“완벽해!, 예술이야 !”
하나님은 당신이 성장하는 모든 단계들을 다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을 미루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것과 나쁜것, 그리고 추한것도 다 아신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로마서 8장 31절의 고백이 당신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2. 하나님께서 다루시도록 하게 하라
완벽주의의 저변에는 항상 다스리려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피곤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다스리려 한다. 아내를 다스리려 하고, 남편을 다스리려 한다. 자녀를 다스리려 한다. 친구를 다스리려 한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기억하라. 인생의 대부분은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이다. 만일 그것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 되고 만다. 당신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잘하실 수 있다.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니라”(벧전 5:7)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해 지기 위하여 완전해 질 필요는 없다. 완전한 휴가는 없다. 그런 휴가는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결혼도 없다. 나는 죄인과 결혼했다. 내 아내는 더 큰 죄인과 결혼했다. 완전한 자녀도 없다. 완전한 교회도 없다. 성경말씀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을 즐긴다는 것은 불완전한 환경 가운데서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뇌성마비 자녀를 가진 부모가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딸은 자신의 힘으로 똑 바로 앉을 수도 없고, 그 부모는 24시간 그 아이를 돌봐야 하는 진을 빼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그 아이를 돌보며, 아이의 얼굴을 보며, 간질음질을 치며, 햇빛을 쬐고 걸으며 한 순간 한 순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당신도 가능하다. 어느 순간을 즐기기 위해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밀린 청구서가 있어도, 소음이 들려오고, 문제가 남아 있어도 그러한 불완전한 순간 속에서고 감사할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당신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당신은 본래 만족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불완전한 곳에서 부족한 존재로 살고 있다. 아직 완벽한 것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것을 배울 수는 있다. 나는 당신이 현명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완전주의를 하나님의 평안으로 바꾸라. 남에게 인정 받기 위해 혹은 하나님께 인정 받기 위해 얼마나 피곤한가? 여기 예수님께서 한가지 제안을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다. 오직 완전하신 그분의 은혜로만 인간은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도 완전함을 기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perfect)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마 5:48)
문제는 당신이 온전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주님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살아나야 한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예수님을 당신에게 보내신 것이다. 당신이 염려해야 할 유일한 염려가 히브리서에 나와있다. 히브리서 12:5 을 보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당신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오직 염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인관 관계를 힘들게 한다. 당신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필요하듯이, 당신의 사랑으로 이웃의 연약함을 품으라.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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