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 평화없이 한반도 평화없다
– 과거 이데올로기적 사고에서 벗어나 역사와 대화하는 자세 필요

[앤아버=주간미시간] 김택용 기자 = 20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저명한 잡지 세카이지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장기 연재하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던 전 한림대 지명관 교수가 남한국학 연구소(소장: 곽노진 교수) 초청으로 앤아버에서 강연했다.
11월 8일(토) Palmer Commons 빌딩 Forum Hall에서는 도시샤 대학 코리아연구센터 오타 오사무 교수의 진행으로 지명관 교수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의 1970년대에 대하여 – 민주주의를 향한 진통의 10년’ 이라는 제목으로 유신 시대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회상했다.
지명관 교수는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속을 헤치고 나오면서도 하나님이 이 민족을 이렇게 비참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평북 정주 출신인 지 교수가 가지고 있던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앙’이 바탕이 되었다. 46년에 생긴 김일성 대학에 제1회 학생으로 입학했지만 공산주의의 철저한 쇄뇌교육도 복음주의로 무장된 그를 바꿔놓지 못했다. 당시 김일성 대학에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너는 남쪽으로 가야할 사람”이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당시 이남, 이북의 똑똑한 지식인들이 모여든 김일성 대학내에서도 공상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늘어가기 시작하면서 회의를 느낀 그는 남하를 결정한다.
한국 전쟁에 대한 회고에서 지 교수는 “한국 전쟁은 동북 아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규정하고 당시 남한 국민들은 미군에 반대하고 북한 국민들은 소련에 반대하는 형세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쪽에서는 반공파와 좌익파로 크게 나뉘어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반공파에 친일세력이 포함되면서 복잡해졌고 좌익파들은 북에대해 실망하는 목소리들이 높았다고 전했다. 그 어느쪽에도 속하기를 꺼려했던 지 교수는 세상과 등을 지게 되었으며 신문도 안보는 비정치적 인사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신앙을 추앙했는지 모른다. 전쟁 후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반공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교회는 지나치게 친미로 돌아서 정을 붙힐 수 가 없었다. 부산에서 군대에 징집이 되었다가 통역장교로 지원했다. 그는 늘 “이런 비참한 생활이 달라지리라는 기대를 놓치 않았다”고 전한다. 기대가 있으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지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947년 충주 사범부속초교 교사를 시작으로 덕성여고 교사, 덕성여대 조교수, 서울대 문리대 강사 등을 역임했다. 또 1982년 동경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1993년 정년퇴직까지 일본 교육현장에서 한‧일간의 상호이해 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30대에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뜨거운 여름 창문을 다 열고 수업을 하니 옆방에서 수업하는 소리가 다 들려 방해가 된다는 불평이 많았다. 그래서 “덥지만 창문을 반만 닫고 수업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아무도 그 지시를 따르는 교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사들을 모아놓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토의를 하기로 했다. 토의 끝에 창문을 반만 열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모든 학급들이 그 결정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지 교수는 “한국 국민은 명령을 하면 듣지 않지만 참여시켜 협의하면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지 교수는 그 이후 교직에서 나와 ‘사상계’에 취직한다. 1966년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이 한일문화교류단에 지 교수를 참여시킨다. 한일회담 반대등으로 장준하 자신이 일본에 갈 수는 없었지만 큰맥락에서의 한일 교류에 찬성했던 장준하는 지 교수가 일본의 지식인들과 연계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장준하는 “나는 못하지만 자네가 화해의 시대를 열어달라”고 당부했었다. 당시 일본은 패전후 재건을 위해 미국과 유럽과의 교류에만 열을 올릴 때다.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1965년 한국과의 회담도 일본이 원했다기 보다는 미국이 강요했기 때문에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아시아 전체의 평화구축을 위해 미국은 중공, 소련를 상대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간의 공조관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 교수가 산 1970년대는 혼란의 시대였다. 국회 해산과 계엄령이 선포되던 72년 10월 지 교수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그곳에서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일본을 보았다. 반면 한국은 혼란속에서 70년대를 낭비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73년부터 88년까지 15년간 한국의 상황을 일본의 잡지 세카이지에 기고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미행도 받았다. 취조도 받았고 고문도 당했다. 하지만 목숨만은 살려줬다. 제2의 김대중 납치와 같은 사건이 부담이 되어서 일수도 있지만 요원들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윽박지르면서 취조를 하던 중정 요원이 신문에 ‘아무일 없을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써서 남이 보지 못하게 살짝 보여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때 지 교수는 ‘좌익이던 우익이던 생존을 위해 이런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이 민족은 참으로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전한다. 그는 취조를 받으면서도 “이 국민은 미워할 수 없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가 궐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의 네트워크가 나라를 살리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해외 기독교인들의 도움이 컸다. 사람편에 자금을 보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정치적인 이득을 초월한 정신을 가졌고 전세계적인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네트워크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작동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의 동지적 연대가 역사를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한국의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서 한중일 3국의 지식인들을 모으는 작업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각국의 국사를 넘어서는 동북아의 역사를 바로 쓰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제안이다. 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 편찬이 그것이다. 동북아의 평화없이는 한반도의 평화도 없기 때문에 이것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일이 성사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종교는 양보하고 물러나는게 맞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을 위한 센터가 미국에 세워져 동북아 국가들에게 권고할 수 있는 강력한 기능을 가질 수 있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를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역사는 변한다. 그래서 누구도 과거에 머물어 있지 말아야 한다. 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를 변화시키려면 어두운 면만 보고 두려워 하지 말고 달라져 가고 있음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의식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층에 똑같이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모으느냐가 숙제다.
올 8.15 경축일에 지식인 연합회가 [미래 지행적 관계]를 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자금부족으로 무산되었다. 내년에 깜짝 성명이 나올 수 도 있다. 지 교수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세대가 살아있는 지금, 그래서 일본과 대화할 수 있는 지금이 일본과의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KBS 이사장 자격으로 방북했을때 두고온 고향을 볼 수 있었다. 비참한 북한 실정을 보면서 피눈물이 났다. 자신을 안내하던 부부장에게 지 교수는 “내가 지금까지 북한을 증오했었으나 이제부터는 미워하진 않겠다. 나의 형제라는 생각을 갖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동서독처럼 감쪽같이 통일이 올 수 있다. 하지만 통일의 그날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면 가능해 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북한이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군대가 침묵해야 한다. 2. 국제적 관계가 보다 원숙해져야 한다. 3. 동북아시아 평화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과 유리되고 국제사회에서 가장 이질적인 집단은 해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피해도 없는 통일, 성국한 국제 시민의식이 끌어올리는 통일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남북한 정부가 과거 이데올로기적 사고에서 벗어나 역사와 대화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지교수는 이번 행사가 자신의 일생에서 마지막 공식행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북아 미래에 대한 평화비젼을 제시하는 90세 고령의 눈빛에는 아직도 할일이 많이 남아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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