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간관계의 적: 완벽주의(은혜 vs 완벽주의)

손경구 목사

완벽주의는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완벽주의가 무엇인가? 완벽주의는 완전해 짐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영적성숙의 모조품이다. 나는 목회를 하며 완벽주의가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을 보아왔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은혜가 거저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원은 너무나 어렵고 중요한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이 무엇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무엇을 해주시기 않으면 인간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 가운데 있는 인간은 은혜를 통해 영원한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은혜를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은 주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체험하며 살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것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도와드려야겠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서, 내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시발점으로 해서 우리는 치명적인 두 가지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 중에 하나는 규칙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는 율법주의 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해 짐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완벽주의 이다. 이러한 은혜의 두 가지 적인 율법주의와 완벽주의를 초점으로 다룬 책이 갈라디아서이다. 하나님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너의 삶에 하나님의 웃음을, 하나님의 격려를, 하나님의 인정을 노력해서 벌기 원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You began your life in Christ by the Spirit.  Now are you trying to make it complete by your own power.  This is foolish. (갈 3:3)
누군가 나에게 신앙생활의 가장 무서운 함정을 말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말한다. 그것은 은혜로 시작했는데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함의 함정에 빠져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도 힘이든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정죄한다. 스스로 불평하며, 불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실상은 자기 자신이 시험에 들고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너희가 성령으로 아름답게 시작했는데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고 한다고 하신다.
완벽주의는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항상 잔소리를 하며, 항상 고쳐주며, 항상 곧아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하는 일을 항상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로 피곤한 일이다. 그 누구도 항상 곧아야 하고, 완전한 사람과 같이하려 하지 않는다. 실상은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항상 완벽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게 된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완벽주의는 항상 고쳐주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다른 사람에게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전 7:16)
이 말씀을 의인이 되지 말라거나 지혜를 구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라. 이 말씀의 초점은 후반부에 있다. “왜 스스로 불행하게 하느냐?”는 말씀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우리가 이 간격을 잘 다루지 못하면 이상적인 자아는 스스로를 향하여 항상 잔소리를 하게 된다. 잔소리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서 항상 잔소리를 한다. 자신을 향해서 ‘나는 잘해야 한다. 언제까지 이러겠느냐, 나는 너무 뚱뚱하다. 나는 너무 어색하다’라고 성가시게 한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파괴한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가 되기 이전에 어느정도 완벽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성장하면서 부모이든, 문화이든, 친구 이든 간에 늘 당신에게 요구해오던 것들을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듣기 시작했다. “너는 목사의 자녀니까, 너는 장로의 자녀니까, 너는 집사의 자녀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우리 집안은 3대 4대째 믿음의 가문이니까 너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왜 이것을 하지 않느냐, 더 잘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있다. 이러한 피곤함에 대한 대책은 어떤 심리요법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어떤 약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완전하지 않다. 시편 119편 96절을 보라.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Nothing is perfect except God’s Word.)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완전하기에 당신의 삶을 그 말씀 위에 세워야 한다. 아무도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 7:20)
I’m OK, You’re OK?라는 책이 있었다.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I am not OK and you’re really not OK!’이다. 당신은 불완전하다. 나도 완전하지 않다. 진실을 말한다면 I’m not OK, and you’re not OK. But because of God’s grace that’s OK! 나도 OK가 아니고, 당신도 OK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OK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Unconditional Love)이다. 그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나와 당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이 말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장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당신이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라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OK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장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먼저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시는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신이 아직 죄인이어도, 당신이 아직 바보 같아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먼저 당신을 받아주시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신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드디어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까지 당신을 만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타났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 파놓은 함정인 윤리와 율법과 완벽주의의 잔소리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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