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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자녀 양육 태도

◈평소 생활 속에서 자녀에게 모범을 보인다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원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부모의 양육 태도’라고 생각된다.

양육 태도란? 바람직한 자녀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며, 자녀 행동 표현에 대한 부모의 반응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정과 사회의 하나의 문화 패턴으로서, 자녀의 인성과 행동은 그들 부모의 양육 태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부모 이상의 훌륭한 스승은 없다. 특히, 아동기에 있어서 어머니의 양육 태도는 출생 후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때문에, 아동의 원만한 인성과 지능, 생활 태도를 결정짓는 요인의 근본은 부모의 양육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아동을 만드는 것도, 그들 부모와 가정 환경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기에, 문제아동의 행동 양식이 청소년기의 비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회문제와 다른 자녀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부모 양육 태도에 대한 개입은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아빠, 엄마를 꼭 닮았니?” 가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칭찬함을 주위에서 본다. 그러나 외모만 닮는 것이 아니다. 함께 생활하다 보면 생활 습관은 물론 말버릇, 걸음걸이조차도 부모를 닮아 갈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딸은 엄마를 닮고 아들은 아빠를 닮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 온 아이들이 유치원, 학교생활에서도 그대로 행동함은 당연할는지 모른다.

아이의 얼굴 표정에서 그들 부모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부부간의 불화가 잦은 가정의 아동은 얼굴 표정이 밝지 못하다. 부부가 서로 대화로써 평등한 관계에서 가정 일을 해결해 가는 집의 아이들은, 행동 표현이 밝고 활달하며 친구의 의견도 존중할 줄 안다.

사람이 꽉 들어찬 지하철 안을 들여 다 보자.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다른 사람은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떠들어댄다. 자신만 편하게 다리를 벌려 앉고, 둘러맨 가방이나 물건이 타인을 불편하게 하든 말든, 어린아이가 공을 굴리며 소란을 피우며 다녀도 제지하기는 커녕, 자기 자식이 하는 행동을 귀여운 생각만 앞세워 함께 웃고 대견스러워 한다. 이렇듯 우리는 종종 지하철 안의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겠는가? 지하철 안은 으레 소란스러운 곳이고, 자유스럽게 행동해도 된다는 어른들의 행동 습관을 따라 배울 것이다. 가정 내의 일상생활 습관은 물론 신호등을 지켜 길을 건너는 교통질서에서부터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방법에까지, 부모 된 입장에서 자녀에게 보여주고 귀감이 되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본받는다. 인내심, 협동심, 친절함, 봉사 정신 등, 보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나 자신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낼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를 갖는다

우리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애착이 세계 어느 나라 민족보다 강하다. 우리 엄마들은 아이를 가지면서부터 자식에 대한 희생으로 시작한다. 반면에, 이런 헌신적인 희생에 대해,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려 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등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댓가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혹시, 남에게 뒤떨어지지나 않을까?’ 자녀의 기를 꺽지 않게 하려고 모든 응석을 다 받아 주는 예도 있다. 아이가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는 경험을 해볼 겨를도 없이 뛰어 가기 바쁘다. 식탁에선 어른보다 먼저 맛있는 음식을 골라 아이 입에 떠 먹이기 바쁜 엄마가 있다. 목이 메일 것 같으면 엄마는 의례 물까지 넣어 줄 테니까. 아이는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된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생활 습관은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 가족 제도하의 자녀들 대부분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정성어린 부모의 땀과 노력으로 학교를 마친다. 대학까지 마치면 가장 좋은 혼처를 물색하고 많은 결혼 비용을 마련하여 출가를 시킨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고추장, 된장, 밑반찬거리를 챙겨 주는 정성은 물론, 며느리의 살림살이까지 관여하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교수 몇 분의 아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생 대부분이 대학을 졸업하기까지는 7∼8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등록금이 모자라면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또다시, 학교에 다니는 일이 반복된다고 하였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시집을 보내지 못해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18세가 되어도 스스로 독립하여 부모 곁을 떠나지 못했음을 이웃이 걱정해 주는 것을 보았다.

문화적 정서나 사회구조가 다르기에, 그들이 꼭 옳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경험은 산 교육이 될 수 있다. 네명의 자녀를 키우면서도 “공부해라”는 말은 하지 않는 대신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도록 가르쳤다.”는 어느 노부부의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

◈자녀를 경멸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준다

대부분의 우리 부모들이 자녀의 잘하는 부분을 칭찬하기보다는 늘 부족하고 모자란 점만 지적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너는 그것도 못하니?
·누구를 닮았기에 그러니?
·네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니?
·뚱뚱한 주제에 먹는 것만 밝히니?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정말 바보로구나!

·왜 너는 공부를 못하니?… 등 부모라는 권한으로 쉽게, 무심코 아이들에게 내뱉는 언어 표현들이 수없이 많다. 더구나 동생이나 친구,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어른의 말과 행동은 자녀를 교육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이켜 보자. 자녀들에게 해주는 말의 대부분이 ‘∼하지 마라’ ‘∼하면 안 된다’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자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해 주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 마라”의 표현 대신 “어쩌면 이렇게 잘 할 수 있니?”
“이번엔 국어 성적이 지난번보다는 많이 좋아졌구나”
“이건 엄마도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인데……”

“우리 00가 참 많이 컸구나. 이렇게 훌륭한 생각도 할 줄 알고……” 등의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해 보자. 자녀의 부족한 점을 책망하기보다는 그 중 한 부분이라도 잘하는 점이나 착한 면을 들어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부모가 해주는 칭찬과 격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아동은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게 된다. 그런 아동의 활동은 위축되어 있으며 자신을 표현하는데 적극적이지 못하다. 성격은 소극적으로 길들여 질뿐아니라 의사표현이나 지적능력, 학습능력 또한 원활한 발달을 보일 수 없다. 어른들도 타인으로부터 매사에 ‘잘못한다’라고 비난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무언가 더 잘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겠는가? 아직은 나이 어린 까닭에 쉽게 잊어버리고 잦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일이 어른의 마음에 들만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면 어찌 아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잘못한 일 보다는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나 잘한 일을 부각시켜 칭찬하고 격려해 준다면, 아이들의 생활태도 역시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남보다 앞서는 것보다는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가운데 타인과 협력하고, 공동체 이익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으로 이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하나의 생활 공동체이다. 나만을 위한 삶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질서를 지키고 남과 협력하고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 모두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이루어 낸 부와 명예도, 결국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있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빨간 불’‘파란 불’ 신호등에 맞추어 길을 건너는 것도, 공원 도서관 지하철 등 공중 시설을 이용할 때 줄을 서는 것도, 이웃의 어려움에 눈을 돌려보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도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몇 년전, 미국 여행을 하면서 해외 입양 아동을 에스코트 한 적이 있었다. 쌕쌕거리고 잠을 자는 영아를 안고 비행기를 내릴 때, 함께 갔던 일행이 일어서서 뒤따르려 하였다. 앞좌석에 있던 중년 신사분이 손을 뻗어, 우리 일행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 당겼다. 그는 언어가 통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행동으로 ‘천천히’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갓난아이를 안았던 내가 제일 먼저 내렸고 그 다음은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 성인 남자 순으로 트랩을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항 검색 대에서 영아를 안고 있는 우리 일행이 지체할 여유도 없이, 공항 직원이 대기하여 특별 출입구로 free pass하도록 배려하였다. 분명 나 때문은 아니었고 어린아이에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였다.

연약한 어린아이와 노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가운데 사회질서를 만들어 가는 그들의 문화를 존경어린 눈으로 보았다. 잘 아는 후배 한 사람이 유학으로 미국 유타주에 갔을 때, 가족 모두가 언어 때문에 불편함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웃의 관심은 너무 따뜻했다고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이웃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에게 장난감을 손에 들려서 데려왔다고 한다. 아이들끼리 함께 어울려 놀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였음이다.

빈부의 격차를 따져, 통행을 하지 못하게 아파트 단지 사이에 담을 쳐 놓고는, 왕래할 수 없도록 했다는, 어느 지역의 우리네 생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고 하였다. 난, 하루아침에 이런 문화와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부모나 사회 구성원 다수가 모범을 보였고 또, 그런 사회에 동화되는 그들이 선진 문화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나 자신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삶이 소중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박정규 아동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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