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기독교인인 내가 무슬림 압둘의 출마를 존중하는 이유

케네디에서 엘사예드까지, 66년이 지나도 반복되는 종교의 장벽… 한인사회도 생각해 봐야 할 미국 민주주의의 의미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존 F. 케네디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나 국가 운영 철학보다 종교 때문에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아야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 헌법보다 로마 교황의 지시를 우선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이었다.

당시 미국은 개신교 중심의 사회였다.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일부 미국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케네디는 1960년 9월 12일 휴스턴에서 열린 개신교 목사들과의 모임에서 역사적인 말을 남겼다.

“나는 가톨릭 대통령 후보가 아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일 뿐이다.”

케네디가 강조한 것은 간단했다. 자신은 가톨릭을 대표하기 위해 대통령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을 위해 일하려는 것이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적 의무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2026년, 미시간에서 비슷한 장면이 재현되고 있다.

미시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압둘 엘사예드(Abdul El-Sayed)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타운홀 행사에서 엘사예드는 무슬림형제단을 규탄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규탄한다고 답한 뒤, 왜 자신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미국 헌법 이외의 다른 대상에 충성할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야 하는지 반문했다.

그리고 케네디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무슬림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니다. 나는 연방 상원의원이 되려고 출마했고, 단지 무슬림일 뿐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이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하고 있다. 그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바꾸는가.

나는 이 질문을 한인사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오늘날 한인들이 누리는 권리는 누가 열어 놓았는가

미국의 흑인들은 오랫동안 노예제도와 인종분리, 투표권 제한과 사회적 차별을 겪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행진했고, 부당한 법에 저항했고, 때로는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은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1965년 이민법 개혁은 아시아를 비롯한 비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에게 미국으로 향하는 문을 크게 열어 주었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흑인 민권운동만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 인종적 평등을 향한 사회적 변화가 미국의 이민제도 개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대학에서 가르치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자녀들을 미국 사회의 지도자로 키워낼 수 있는 환경 역시 이러한 역사적 변화 위에 형성되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우리보다 먼저 차별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열어 놓은 길의 결과다.

그렇다면 지금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편견과 의심을 견뎌야 하는 정치인들의 도전이 언젠가 한국계 미국인 후세들에게도 또 다른 기회를 열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이번 선거를 바라보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정치는 종교의 우열을 가리는 곳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신앙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믿는 종교가 다른 사람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무슬림 역시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서로의 신앙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종교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어느 종교가 더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곳이 아니다. 시민들이 서로 다른 믿음과 가치관을 가지고도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곳이다.

미국 헌법은 공직에 진출하기 위한 자격으로 특정 종교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도, 상원의원도, 주지사도 특정 종교의 신자여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의 정책보다 종교와 인종, 출신 국가를 먼저 문제 삼는 장면을 목격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위해 수천 가지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심지어는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배척한다.

하지만 서로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550만 명의 미국 무슬림, 그리고 미시간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26년 미국의 무슬림 인구는 약 550만 명에 이른다. 미시간에도 수십만 명의 무슬림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도 있고, 의사와 변호사, 교사, 자영업자, 대학생과 군인도 있다.

이들 역시 미국에서 세금을 내고 자녀를 교육하며 지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주민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우리는 한인사회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한국계 미국 정치인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한인 유권자들이 겪는 언어 문제, 이민 문제, 소상공인들의 어려움, 자녀 교육 문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슬림 주민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정치인의 등장을 반기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물론 무슬림 정치인이 무슬림만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계 정치인도 한국인만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연방 상원의원은 어느 특정 종교나 인종의 대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주의 모든 주민을 대표해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의 책임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시간을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무슬림이 선출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불편함과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미시간이 기독교인만의 주가 아닌 것처럼, 미국 역시 어느 한 종교만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비판할 권리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 말이 엘사예드의 모든 정책과 정치적 입장에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전국민 의료보험, 세금정책, 기업 규제, 이민정책 등에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다.

그의 정책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기업과 근로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시간의 자동차 산업에 도움이 될 것인지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렇게 비판할 수도 있다. 반대로 상대 후보의 보수적 정책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비판할 수 있다.

그것이 선거다.

그러나 그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테러리즘과 연결하거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후보자가 실제로 어떤 발언을 했는지,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종교를 곧바로 정치적 위험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케네디가 가톨릭 신자였다고 해서 교황의 대리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엘사예드가 무슬림이라고 해서 이슬람 전체를 대표하거나 특정 종교조직의 대리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국 유권자가 판단해야 할 것은 그의 종교가 아니라 공직자로서의 자질과 정책, 그리고 헌법적 책임을 다할 능력이다.

블루와 레드가 충돌하는 미국에서

미국의 선거철은 때로 잔인하다.

민주당을 지지하면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고, 공화당을 지지하면 극단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블루와 레드가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상대의 정책뿐 아니라 인격과 정체성까지 공격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미국 민주주의의 힘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끝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나라가 아니었다.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고, 흑인들은 법적 차별을 받았으며, 아시아인들은 이민과 시민권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수많은 갈등과 저항, 타협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해 왔다.

한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가톨릭 대통령이 탄생했으며, 이제 무슬림 정치인들도 지방정부와 연방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가 사회의 갈등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 가능성이 과거보다 넓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에는 한국계 미국인 대통령이나 연방 상원의원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그날 한국계 후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어쩌면 오늘 다른 소수집단의 정치적 권리를 존중하는 일이 내일 우리 자녀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미국의 성숙함

평생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면서도 상대방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다.

이번 선거에서 엘사예드가 승리할지, 마이크 로저스가 승리할지는 유권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누가 승리하든 중요한 것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우리가 같은 미시간 주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선거에서 다른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웃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애국심을 의심해서도 안 된다.

66년 전 케네디는 자신의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믿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이야기했다.

2026년 엘사예드의 도전은 우리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원하는 미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나와 똑같은 종교를 믿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나라인가. 아니면 종교와 인종,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신념을 가지고 국민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인가.

나는 후자의 미국을 기대한다.

내가 믿는 신앙을 지키는 것과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종교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신앙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블루와 레드가 충돌하고, 서로를 사회주의자와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며 공격하는 선거철이지만, 그 모든 갈등을 넘어 언젠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미국인들의 성숙함을 기대해 본다.

그것이 지금까지 미국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도 지켜 나가야 할 가치라고 믿는다.

김택용 / mkweekl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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