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 1 독립운동의 배경과 역사적 의의

김진상 목사/앤아버 한인회 10대회장/태극마을 회장

3.1 독립운동은 일제강점 시대가 시작된 1910년 “한일 병합조약”(일명 한일 합방조약, 한일 평탄조약, 한일합방 늑약, 국권피탈, 경술국치)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에 전국에서 일제의 강압과 지배에 항거하여 전개된 가장 빛나는 민족해방운동이다.

먼저 역사적 배경으로 “한일병합조약” 5년전인 1905년 11월 17일에 대한제국정부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정부의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한 “을사조약”(일명 을사늑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 을사불평등조약)을 기역해야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정부는 일본제국 정부의 감리, 감독, 감시, 지휘를 받는다”는 크게 잘못된 불평등 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많은 수모를 받게 된 것이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기에 앞서 1903년 12월 일본 각의에서 한국을 일본의 권세하에 두기로 결의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 침공을 위하여 인천상륙, 황성(서울)을 점령했다. 이때 고종황제는 감금되였고 명성황후 및 많은 대신들이 살해 되었다. 이에 고종황제가 제1차 한일 협약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일본 밀사를 파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맞서 일본은 고종황제의 모든 외교권을 박탈하고 2차협약인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이때부터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시 한일기본조약의 제 2조를 통하여 무효임을 상호 인정하였다.

을사조약 5년후 1910년에 “한일 병합조약”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다께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켜 8월 29일에 공포하였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은 실질적인 통치권을 상실하였다.

3.1 독립운동은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하여 독살되였다(식혜를 드신 후 급사했음)는 소문이 확산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순수한 독립운동이었다. 이 놀라운 거국적, 비폭력 민족해방운동은 모든 계층이 참가한 역사적 자주독립운동이였다. 3.1독립운동은 1918년 11월 11일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국 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음으로 양으로 일어난 것이다. 여운형, 김규식, 장덕수, 김약연, 손병희등이 큰 역활을 하였다.

3.1 독립운동은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알리고 일제가 선전하고 있는 “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넘겨준다” “조선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달게 받는다”는 일제의 선언이 완전 날조라는 것을 만 천하에 폭로하고 일본을 규탄하려고 한 거국적 해방운동이였다.

3.1 독립운동은 당시 민족종교인 천도교 대표 손병희에 의해 주도되었고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도인 2명이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였으나 한용운이 이를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투인데다 내용이 너무 온건하다하여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한용운이 공약 3장을 첨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우리 조선제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일본제국의 강점이 불법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민족적 절규였다. 한편 위대한 신앙인들의 사랑과 용서의 인류박애정신을 나타내어 조선인의 위대한 민족성과 철학을 일본인들에게 알려 줌으로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첯 선언문이 되였다. 윤치호, 이상재는 서명을 거부하였고 33인만이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33인중 29인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식당에 뫃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총독부에 연락하였다. 60여명의 일본헌병과 경찰이 이들을 연행하여 갖고 태화관에 오지못한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는 경찰에 자진출두하였다. 33인중 김병조는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하였고, 약속장소인 태화관에 나오지 않은 길선주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체포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3월 1일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조선독립만세 !!!” 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이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태극기를 흔들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를 위하여 50만명의 사람들이 황성(서울)에 모여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그후 천안 아우내 장터 –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 익산 이리 장날 – 군산 – 만주 용정 만세운동, 마산일대 삼진의거, 제암리 – 곽산 – 사천 – 화수리 – 맹산 – 대구 – 합천 – 남원학살 사건으로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 만명이 체포되여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60일간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조선독립만세운동 집회수는 1542회, 참여인원은 202만 3089명,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는 1만 5961명, 구속자는 5만 7770명이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26년 후인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에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한 결과로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종결). 이 결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후 41년만에 대한민국은 완전 독립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3.1 독립만세운동을 1949년에 국경일로 제정하였다. 3.1 독립만세 운동은 변화하는 역사 앞에 민족의 당당함과 자주독립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는 역사적 가르침이였으며 대의 앞에 소아를 버리고 하나가 될 때 위대한 민족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를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한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희생과 책임없이 이루워 지지 않는다. 오늘 현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쟁폐허국가가 58년만에 세계 11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또한 유엔사무총장을 연임하는 국가요, 세계 2위로 해외선교사 3만명을 파견하고 있는 국가가 되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일제의 통치하에 주권을 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한 모든 선렬들에게, 일본제국을 항복시켜 조국의 광복을 안겨 준 미국에게, 6.25동란으로 대한민국 국가존립의 위기를 도와 5만4천명의 군인을 잃은 미국에게, 그리고 유엔 참전 16개국에 영원한 감사를 표하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감사의 일이 넘치는 믿음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제 우리 모든 한인동포들은 선열들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조국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나아가 후세에 자랑이 되고 자손만대 귀한 이민역사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 해야 하겠다.

김진상 목사/앤아버 한인회 10대회장/태극마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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