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발행인 칼럼] 밤송이 가시는 왜 입을 여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병든 올 한 해가 안식년처럼 흘러가고 있다. 외로움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싶어 지난주 토요일 미시간 팬튼에 있는 한 농장에 밤을 따러 갔다.

1시간가량 운전을 하며 색조를 입어가는 미시간의 가을 풍경에 매료되었다.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보는 단풍은 아름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다. 뒤따라오는 겨울이 인생의 종착역이라는 서러움 때문일 것이다.

밤 농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릴 적 시골집 뒤편에 듬직하게 서있었던 밤나무가 생각난다. 기다란 작대기로 입 벌린 밤송이를 툭툭 치면 밤 알갱이가 투두둑 떨어져 머리에 맞기도 하고 때론 가시 달린 밤송이가 등짝에 떨어져 화들짝 놀라 울컥했던 적도 있다.

팬튼에 있는 밤나무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작황이 좋았다. 벌써 바닥에 떨어진 밤송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어서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쉽게 주울 수 있었다.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밤을 줍다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밤을 둘러싸고 있는 밤송이 가시는 분명 포식자로부터 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을 텐데 율방(栗房)이라고 불리는 이 껍질이 밤이 여물면 네 갈래로 벌어져 밤알을 떨어뜨린다.

성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곤두세워 밤알을 지키던 율방이 왜 입을 떡 벌리는 것일까?

때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열매가 곧 씨앗인 셈이니 입을 벌려 밤알을 떨어뜨려 종식 번식을 하겠다는 셈일 것이다.

살기위해 가시를 곤두세우고 또 살기 위해 가시를 벌려 생명을 내보내는 것이다.

장미꽃 줄기에 가시가 있어서 장미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아름다운 미녀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가시가 있어 더욱 매력적인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가시를 갖고 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본능으로 누구나 날카로운 시선이나 뽀죡한 말투로 방어막을 친다.

이건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끼리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핵무기라는 가시를 만들어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으르렁댄다. 누구는 무력, 경제력을 내세워 자신을 보호한다. 협박과 설득으로 가시를 열려는 노력이 팽팽한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갈등은 때가 차고 익어야 열릴 것이다.

밤송이의 가시가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은 밤이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밤이 익고 때가 되면 성난 가시도 입을 벌린다. 그래서 다람쥐의 먹이가 되고 또 머리 나쁜 다람쥐가 땅에 묻어 놓고 찾지 못한 것이 이듬해 싹을 튀어 새 밤나무로 태어나기도 한다. 게다가 밤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거름이 되어 밤나무를 살찌게 하기도 한다.

율방이 열리면 밤색 껍질이 있고 그 껍질을 벗기면 삽피라는 떫은 맛의 속꺼풀이 나온다. 이런 3중의 보호막을 참아내야 마침내 달콤한 밤 알맹이를 만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게 쌓여있는 밤 알갱이는 수고한 만큼 더 맛있다. 3겹으로 둘러싸여 보호를 받아서 인지 수분이 남아 있어 썩지 않는다.

주간미시간 발행인
김택용

따가운 가시를 집게를 이용해서 헤집어 파헤칠 수도 있지만 가시가 열리지 않은 것은 밤이 익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인다. 헛수고를 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강제로 하는 것은 옳지 못한가 보다. 때를 기다리면 쉽게 주을 수 있는 것을 가시에 찔려가며 파헤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인생의 종착역에 좀 더 가까워지는 올 가을을 보내면서, 때를 기다리는 여유를 배우지 못하고 행동하면 그 자체가 폭력이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성숙해 지려면 숙성의 시간을 지나야 하거늘, 조급함이 망쳐 놓은 너무나 많은 일과 관계들이 아쉬움이 되어 낙엽처럼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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