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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

“사랑과 모험의 삶이었다”

쟌 김씨는 자기 자랑이 없어 동행하고픈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의 쟌김이 노년의 쟌김에게 참으로 수고했다는 말을 전할 것만 같다.

 

[트로이=주간미시간] 김택용 기자 = 오늘 아쉬움이 남을 또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누나의 보살핌을 받기위해 부산으로 간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그 결과 경기도에 있는 부모와 단절이 되자 살아남기 위해 그는 미군 부대에서 슈샤인보이가 된다. 똘똘한 초등학생을 대견해하던 이태리계 미군이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 뉴욕에 있는 스탠튼 중학교 선생에게 소개한다.

미국이라는 새 땅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부산에 형제들이 모였다. 바로 아래 동생인 김진남씨는 “한 이불속에서 자라던 형이 미국으로 떠난다니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고 회상하고 “하지만 형님은 두려움보다는 설레임으로 흥분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스탠튼 고등학교 미식 축구 선수 시절의 쟌 김

그 고마운 미군과 같은 이름을 갖고 싶어 그도 쟌이라고 개명했다. 53년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로 미국으로 오게 된 그는 뉴욕의 스탠튼 아일랜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다. 캐톨릭 고등학교에서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라인백으로 한 경기에서 4번의 터치다운을 기록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후 캐톨릭의 명문인 노틀담 대학에 진학한 그는 탐 둘리 박사와 함께 라오스와 타일랜드에서 2년의 선교 사역에 동참한다. 그는 병원을 짖고 50명이 넘는 아이들을 받아내는 산파 역할을 해냈다. 나중에 디트로이트 프리프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아이를 받을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하고 “18세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케어하다보니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든 그들은 만족스러워했다”고 덧붙였다. 배고프던 전쟁통에서 미군에 의해 구출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받은 은혜를 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사랑과 모험이 듬뿍 담긴 그의 인생 여정을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쟌 김(1973년 7월 25일~2019년 10월 23일)은 1960년대부터 포드 자동차에서 14년간 근무했으며 그 후에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는 K-Omega라는 회사와 ACAN Windows 회사를 창업해 크게 번창했다. 그는 다수의 특허권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사업으로 케냐 사람들에게 전해 줄 태양열 손전등을 직접 개발중이었다. 전기가 부족한 지역 사람들이 밤에 사용할 수 있는 태양렬 충전 전등을 프로토콜로 만들어 일부 보급했고 대량 생산 보급을 위한 투자자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고 쟌김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 줄 때였다. 그는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 현장에서 그의 삶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선교사업에 열정을 보였다. 디트로이트 한인연합감리교회를 통해 수많은 미션에 참여했다. 우간다, 케냐와 태국에서 70여개가 넘는 마을에 우물을 시추했으며 월드 메디칼 릴리프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잔잔한 미소에 일단 반하고 그의 겸손함에 마침내 감탄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지 않았다.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그는 항상 기쁜 마음으로 그 어려운 일들을 감당해 냈다. 그것이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허한 사람들은 조그만 일을 하고도 크게 떠벌이려 한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좋은 일을 이루는데 더 주목했다. 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하며 동행했던 사람이었다.

너무나 힘차게 달려왔던지 그는 80세를 넘기면서 어려가지 와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신장과 심장에 병이 생겨 최근에는 수혈과 투석으로 병원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래도 80세 생일날 자녀들이 모여 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비디오를 제작해 상영해 주었다. 이루 다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아버지의 삶과 업적을 자식들이 알아봐 주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이 다 몰라도 가족이 인정해 준다면 충분한 것이다.
고 쟌김씨와 사이가 돈독했던 동생 김진상 목사는 “형제들에게 항상 잘했고 온화했던 형님은 존경할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그리고 김선희 형수님의 지극정성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며 감사해 했다. 그의 노고를 아셨는지 하나님은 그에게 다복한 가정을 남겨주었다. 전처로부터 2남 2녀를 두었던 그는 현 부인인 김선희씨와 재혼하면서 또 4명의 자식을 얻었다. 그는 유망인으로 김선희, 6명의 자녀와 15명의 손주를 남겼다.

26일 디트로이트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열렸던 입관예배에서 김응용 담임목사는 고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하나님이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어 편히 쉬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쟌 김 2세는 조사에서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문제 해결사였다”고 말하고 “포드 자동차에서부터 선교사역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부터 아프리카까지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딸인 케리 김은 “아빠는 너무나 휼륭한 베드타임 스토리 텔러였다”며 “사랑과 모험이 가득한 삶을 사셨다”고 전했다.

쟌 김의 의붓아들인 스테판 리는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다시 결혼을 하다고 했을때 우리 형제들은 모두 비관적이적지만 오래되지 않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그는 선교 사역을 통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든것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형제들을 위해 항상 희생하는 참으로 좋은 아버지였다”고 감사해했다.

둘째 남동생 김진상 목사

8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자녀들이 만든 쟌김의 일생을 다룬 비디오를 소개한 아들 크리스토퍼 리도 “아버지는 나의 인생을 밝힌 환한 빛이었다”고 전했다.

쟌 김의 둘째 동생인 김진상 목사는 “7남 3녀중 둘째였던 쟌 김은 큰 형이 전쟁에서 전사한 후 맏형으로써 동생들을 위해 헌신적이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가 행한 좋은 일만 기억하사 위로해 달라”고 기도했다.

쟌김의 장례 예배는 색다른 감명을 주었다. 재혼과 의붓자식에 대한 편견에 쌓인 유교적인 전통이 있는 한인사회에서 재혼으로 만난 부부가 새로 이룬 가정에서 또다른 사랑을 일구어낸 행복한 가정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느꼇던 어색함이 친숙함으로 변하고 서로를 더욱 위하는 끈끈함으로 익어갔을 그들의 아름다운 인생 2막이 아름다워 보인다.

공교롭게도 쟌 김의 장례식이 있던 그날 밤 차디찬 비가 내리는 미시간대학 빅하우스에서 열린 노틀담과 미시간 대학의 풋볼 경기에서 45대 14로 미시간이 대승했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모교인 노틀담은 아들들은 미시간 대학을 열렬하게 응원했을 것이다. 확자지껄 웃으며 한데 어울렸을 그들이 더이상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쟌 김은 자식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온화한 미소로 다가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따뜻한 사람, 그래서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디트로이트 한인연합감리교회 김응용목사가 와이트 채플에서 고 쟌 김씨의 장례예배를 집도하고 있다.

mkweekl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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