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개론을 가르칠 때마다 항상 재미나게 가르치는 단편소설 하나가 있다. 1982년에 <백년간의 고독>이란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남미의 콜럼비아 출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ía Márquez)가 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익사체” (The Handsomest Drowned Man in the World)가 바로 그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좀 기이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날 오후, 약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바람이 심한 벼랑위의 조그맣고 황량한 마을의 해변으로 하나의 익사체가 밀려온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먼저 익사체를 발견하고 가지고 노는 걸 마을 남자들이 보게 된다. 그남자들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집으로 사체를 옮겨 놓은 다음 이웃 마을에 혹시 행방불명된 사람이 없나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러는 사이 마을 여인네들은 뒤에 남아 시체를 돌보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시체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익사체의 장례를 손수 치러 주기로 결정한다. 여인네들은 풀잎으로 만든 걸레로 시체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고, 머리카락에 엉겨붙은 자갈을 떼어내고, 살갗에 붙은 덕지들을 벗겨낸다. 시체를 깨끗이 닦아낸 후 죽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이들은 숨이 멈추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신들이 본 남자들 가운데 가장 키가 크고,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사내답고, 가장 체격이 건장한, 그야말로 자신들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그런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시신을 씻어내고 옷을 만들어 입히는 과정에서 여인네들은 익사체에 점점 매료되게 되며 그동안 남편들에게서 풀지 못했던 욕구와 환상들을 여기에 투사하게된다. 처음엔 아내들이 시체에 매혹된 것에 질투심을 느끼던 마을 남자들도 결국엔 아내들의 매혹에 동참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름모를, 예사롭지 않은 익사체에 에스테반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이웃마을에서 꽃을 가져와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르고, 시체를 바다에 매장하면서 이야기는 끝이난다.
표면에 나타나는 이야기에만 촛점을 맞추면 이야기는 지극히 단순하고 황당무계해 보이기까지 하다. 많은 독자들은 이 작품에 대한 첫 인상을 “odd” 혹은 “weird” 하다고 말한다. 거기다 이야기의 부제도 “Tale for Children”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그러기에 더욱 더 단순한 아이들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표면적으로 드러난는 것 외에 에스테반은 뭔가를 상징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낯선 곳에서 밀려온 비범한 에스테반을 통하여 온 마을 사람들은 하나의 친척 (kinsmen)이 되어가고, 사람들의 삶에(특히 여인네들의)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꽃이 없던 황량한 마을에 향기가 만발하는 변화가 생기는 걸 본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만난 에스테반을 타자(他者)의 상징으로 보고 싶다. 마르케스는 표면적으로 지극히 황당무계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의 커뮤니티가 타자를 만남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세계 밖에서 온, 자신들과 전혀 다른 크기, 미모의 사람, 즉 타자를 만남으로 마을에 어떤 엄청난 변화가 생겼는가는 마을 사람들이 에스테반을 위한 장례식을 마련하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잘 드러나고 있다.
“While they [villagers] fought for the privilege of carrying him on their shoulders along the steep escarpment by the cliffs, men and women became aware for the first time of the desolation of their street, the dryness of their courtyards, the narrowness of their dreams as they faced the splendor and beauty of their drowned men.”(마을 사람들은 가파른 절벽길을 따라 시체를 운반하는 특권을 얻기 위해 서로 싸우면서 처음으로 자신들이 사는 마을길의 황량함과 안뜰의 메마름을 느꼈고, 익사한 사람의 눈부심과 아름다움에 비해 자신들의 꿈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깨달았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마을 사람들에게 난생 처음으로 자신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마을과 자신들의 삶이 “황량”하거나, “메마르”거나, “편협”하다는 걸 모른체로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타자의 타자성(otherness)을 접함으로 자신들의 삶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요, 새로운 상상력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타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삶에 변화와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다시말하면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나의 나됨, 우리의 우리됨을 인식할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구절이 변화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But they [villagers] also knew that everything would be different from then on, that their houses would have wider doors, higher ceilings, and stronger floors so that Esteban’s memory could go everywhere without bumping into beams. . . .” (또한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리란 사실도 알았다. 이제 마을의 집들은 에스테반의 기억이 대들보에 부딪히지 않고도 어디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더 큰 문과 더 높은 천장과 더 튼튼한 바닥을 갖추게 될것이다.)
에스테반과의 만남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협한 삶을 점검하고 평가하여 보다 나은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타자와의 접촉을 통하여 자신들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을 키우고, 천장을 높이고, 바닥을 더 단단히 만들기로 마음을 굳힌다. 만약 에스테반이 자기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면 문이 너무 낮아 항상 고개를 숙이고 집에 들어가야하고, 의자가 너무 작아서 앉을때 불편하리라는 생각들이 에스테반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다시말해서 상상력의 지평이 예전과 비교해서 타자에게로 확장되어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스테반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삶을 축하하면서 자신들의 메마른 땅을 일구어 꽃을 가꾸고, 사람들이 이곳이 에스테반의 마을이란 걸 알도록 집을 밝은 색깔로 칠하고, 그리고 만약 에스테반이 살아 돌아온다면 거처할 수 있을 집을 마련하게 된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면서 우리 커뮤니티도 새로운 활기를 찾기를 바라면서 마르케스의 이야기로부터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이야기 속의 커뮤니티에 변화가 온 것은 마을 사람들이 에스테반의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다른 인간으로 재창조하는 상상력을 발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만나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기존의 틀에 가두거나 편견을 가지고 거리를 두기 보다는 이야기 속의 마을 사람들, 특히 여인네들 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타자성에 접근하고 타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갇혀있는 상상력의 창을 열어 우리 커뮤니티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Copyright ⓒ 미시간코리안스닷컴(http://www.michigankorean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