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미루다간 공멸한다.
목사고시를 볼 대 면접을 하시는 목사님께서 “김 전도사는 앞으로 목사가 되면 보수주의 입장에서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입장에서 목회를 할 것인가?”하고 질문하셨다. 그 질문이 요구하는 정답(?)이 보수주의였기 때문에 나는 보수주의 입장에서 목회를 하겠다고 대답함으로써 무사히 합격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보수와 자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보수가 없다면 자유도 없고 자유가 없다면 보수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새 포도주의 비유에서, 새 부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새 포도주를 담아둘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를 담아두는 것을 진리의 보수라고 정의한다면, 새부대는 의식과 제도으 자유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도주를 담아두는 부대는 언제나 자유롭게 바뀔 수 있어야만 새 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보수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포도주, 즉 진리를 보수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고 부대를 보수하는 데만 관심읅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수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의식과 제도, 그리고 틀은 자유스럽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 부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유함이 있어야만 새 포도주 곧 진리를 보수할 수 있다. 그러한 자유함이 있어야만 새 포도주 곧 진리를 보수할 수 있다. 부대를 보수하면 부대는 자연 낡은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 즉 진리를 보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는 포도주의 보수가 아니라 자루와 부대의 보수, 다시 말해서 기득권의 보수가 아닌가 반성해보아야 한다. 자유해야 할 의식의 보수인가, 주님을 위해 흔쾌히 내어놓아야 할 자리의 보수인가 스스로 비판해보아야만 한다. 의식과 직위는 진리의 보수를 위해 오히려 과감하게 내어놓고 버려야 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낡은 의식과 제도의 옷을 벗자
한국교회는 의식의 보수를 탈피힐 수 있어야만 한다. 시대가 바뀌고 교회의 크기가 바뀌면 당연히 따라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 의식과 제도이다. 의식과 제도는 바뀌어야만 진리를 보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낙후된 의식과 제도이다. 아이들이 자라면 신발과 옷을 바꾸어주어야만 한다. 아이들은 자라는데 계속 어렸을 때의 옷과 신발을 입게 하고 신게 한다면 아이들의 몸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는 아이의 방은 옛날 전족을 한 중국 여인들처럼 돼버리고 말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문제가 자리의 보수이다.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교회의 자리들은 한결같이 십자가를 지는 자리였다. 목사의 자리가 그랬고 장로의 자리가 그랬다. 따라서 당시에는 목사. 장로가 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신학대학은 거의 언제나 미달이었고, 교회의 장로 선거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대학 경쟁률이 6대 1을 넘어서고 있고, 장로 선거도 세상 선거 못지 않게 과열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예전에 십자가였던 자리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면류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목사가 되려면 적어도 밥 굶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것은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목사가 밥을 굶어야만 할 정도니 그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나는 실제로 장로 피택을 받은 것이 부담스러워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아직도 그때와 같이 어려운 교회들이 남아 있지만 많은 교회들은 형편이 좋아졌다. 목사가 되어도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으며, 일부 이기는 하지만 목사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넉넉하게 사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교회 재정도 넉넉해져 교회 재정 때문에 장로가 부담을 져야 할 일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반대로 교회의 재정이 넉넉해지면서 그것을 관리하는 목사와 장로의 권한이 은연중에 커져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전에는 교회의 모든 책임을 목사와 장로가 다 감당했다. 따라서 정책과 예산을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는 모든 일들을 다 목사와 장로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었고 면류관이 아니라 십자가였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제도와 조직이 자연 목사와 장로들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책임에서 권한, 십자가에서 면류관으로 바뀌었다. 단순한 명예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권도 생겨났다. 큰 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되면 거기에 따라오는 명예와 권한, 이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교회 지도력, 십자가에서 면류관으로
이전에 교회의 모든 일을 당회가 감당하고 처리했던 것은 교회 안에서 십자가와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교회의 조직과 제도가 불가피하게 당회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십자가와 책임이 면류관과 특권이 된 후에도 당회원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일과 권한을 이양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에는 할 수 없이 맡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 일에 부가적으로 따르는 매력 때문에 쉽게 그것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너무 부정적으로, 그리고 너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것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목사가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교주처럼 목회하는 교회(pastor’s church)이거나 아니면 장로들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교회(elder’s church)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목사와 장로들의 교회’,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주도권 다툼 속에서 한국교회는 목사의 역할과 장로의 역할을 구별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와 같은 역할 혼동 속에서 점점 더 깊은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개중에는 목사와 장로 사이에 갈등과 알력이 없는 교회도 있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가 더 없이 좋은 모범적이고 화평한 교회가 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평온한데 안을 들춰보면 목사. 장로가 투덕거리며 싸우니만 못한 교회가 있다. 목사와 장로가 협상을 하여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교회를 만들어가는 경우이다. ‘설마?’하고 고개를 저을 독자들이 있겠지만, 부끄럽고 불행하게도 이런 교회들이 분명 있다.
한국교회는 교회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고 교인은 철저히 그를 섬기는 종이 되는 교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목사의 역할과 장로의 역할이 정확히 구별되면서도 차별은 되지 않는 자리로 돌아가는 순수한 교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런 회정(回程)은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본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이권과 기득권을 본능적으로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혁을 이루려면 설교, 교육과 함께 제도개혁을 병행해야 한다.
교회의 제도와 조직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교회의 제도와 조직을 바꾸려고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할 수 있는대로 교회 안에 인간적인 매력이 발 붙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신앙적인 매력만이 선양(宣揚)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책임과 권한이 특정 집단과 계층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조직과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이 일이 급선무이다. 말로 하기는 쉬워도 이런 개혁을 실제로 이루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누군가가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는 한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말이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누군가는 이와 같은 개혁을 위해 종교 개혁의 마음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인간적인 야망과 욕심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의식과 제도, 그리고 직위를 보수하려고 하지 말고 과감하게 낡은 의식과 제도를 개혁하자. 인간적인 욕심을 위해 만든 자리들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지키며, 형식(가죽부대)이 아니라 진리(새 포도주)를 보수하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라고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