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들이 종종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계명(마 22:37-40; 막 12:29-31) 자체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가르침이 아니었다.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테스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 주신 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실제로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미 알고 있을 법한 가르침이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오래 전에 모세를 통해 신명기 6:4-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가장 핵심적인 훈도(訓導)였다. 이 명령에 대해서는 과장법을 사용한 특별한 강조로서 부수적인 지시가 뒤따랐다. 이것을 마음에 새길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쉬지 말고’ 자녀에게 가르치며, 손목, 이마, 문설주 안팎에까지 써 붙이라고 했다(신 6:6-9). 절대로 잊지 말고 항상 염두에 두어 모든 행위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구절에 ‘쉐마’(‘들으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신명기 6:4의 첫 단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 항상 암송하고 묵상했다. 쉐마를 모르면 그는 유대인이라 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 이것을 첫 번째 가는 계명으로 지적했을 때 당연히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또한 구약의 레위기 19:18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율도(律道)로서 예수님 자신이 새로 창안해낸 가르침이 아니었다. 신약의 배경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당대의 여러 유대 문헌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을 모든 율법의 요약 또는 강령(綱領)으로 보고 있었다 한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큰 랍비였던 힐렐은 묘하게도 공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의 개념으로 레위기 본문을 해설하여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극적 의미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본 셈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예수님을 비롯해 바울(롬 13:8-10)과 야고보(약 2:8)는 모두 내 몸을 아끼고 보살피듯이 남을 사랑하여 돌보되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적극적 사랑의 차원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전 율법의 강령이 됨을 확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특출하게 내어놓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장 옛 것이라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의 근본정신에 투철했기 때문에 가장 독창적이고 영감에 넘치는 교훈을 베푸는 스승으로 인정받으셨다. 물론 다른 율법사들의 입을 통해 들으면 케케묵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쉐마와 ‘이웃사랑’의 계명을 한데 묶어 소개하신 점은 독특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규정하고 뒤의 여섯 계명이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는 당연한 통합의 원리를 적용하신 결과였을 뿐이다. 옛 것에 대한 권위 있는 묵상으로 가장 참신한 것을 감동적으로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멋진 지혜였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만 찾다가 무료하여 죽을 지경인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고전(古典)이 가장 참신한 영감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작지 않은 복이다.
유승원 목사의 목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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