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간 Special

50년전 이번 주 디트로이트는…

– 디트로이트 폭동이후 무엇이 변했나?

[디트로이트=마이코리안] 김택용 기자 = 50년전인 1967년 7월 23일 디트로이트에 폭동이 일어나 5일동안 지속되었다. 최초 발발지인 12th Street에 있는 건물들이 불길에 휩싸였고 약탈이 멈추지 않았다.

폭동은 당시 경찰이 새벽 3시경 불법 클럽(주류 밀매소: 현재 Rosa Parks Boulevard and Virginia Park Ave에 위치)을 급습하면서 촉발되었다. 경찰은 소수의 취객들이 있을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건물안에는 82명의 흑인들이 월남참전용사들의 귀환을 축하하기위해 파티를 하고 있었다. 경찰은 전원을 체포하기로 하고 수송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시비끝에 군중들이 경찰에게 술병을 집어 던지게 되었다. 경찰이 떠난 후에 군중들은 인근 옷가게들을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집단 폭동으로 번졌다.

폭동이 전지역으로 번져나가자 조지 롬니 미시간 주지사는 린든 죤슨 대통령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했다. 죤슨 대통령은 폭동 진압을 위해 82와 101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디트로이트 길거리에 탱크도 등장했었다.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의 운명을 바꾼 폭동에서 43(흑인 33명, 백인 10명)명이 사망했다. 24명이 경찰과 군인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6명은 스토어 주인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7,231 명이 체포되었으며 1,189 명이 부상을 당하는 가운데 2,500개의 비지니스가 화재로 소멸되어 4,500백만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디트로이트 흑인들은 이 사건을 riot(폭동)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적인 인종차별과 뿌리깊은 공권력의 희롱에 못견디고 일어난 Rebellion(반란)이었다고 정의하고 싶어한다.

50년이 지났지만 이 시건의 상처는 아직도 디트로이트인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마이크 멕키넌

아이크 멕키넌은 당시 디트로이트 흑인 경찰이었다. 폭동중에 퇴근길이었던 그는 백인 경찰들에게 검문을 당한다. 멕키넌은 경찰복을 입고 있었으나 백인 경찰들은 그에게 총을 겨눴다. 자신도 경찰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넌 오늘 밤 죽었어”라고 말하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가가스로 목숨을 건진 멕키넌은 다음날 상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지만 경찰국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멕키넌은 동료 경찰관에게도 이와같이 했다면 일반 흑은 들에게는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된다고 말했다.

멕키넌은 나중에 디트로이트 경찰 국장이 되었으며 부시장에 오르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흑인들은 수천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중 대부분은 흑인들이었지만 ‘꿋꿋이 버티고 주장한데 대한 값을 치렀다”고 해석하는 목소리가 높다.

폭동이후 여생을 경찰 만행을 개선하기 위해 Coalition Against Police Brutality을 만들어 일하다가 2015년에 사망한 Ron Scott(아래 사진)은 “1967년의 폭동은 백인 경찰관들의 오랜 희롱의 결과였기 때문에 우리는 “민중 봉기라고 부르고 싶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들은 우리는 마구 때리고 무자비하게 구속했다.” 13세 소년이 나의 아저씨와 길거리를 걷고 있는데 백인 경찰이 소년의 얼굴에 샷건을 들이대더니 “야 이 깜둥아 숨을 쉬면 머리를 날려 버리겠다”고 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디트로이트 시장이었던 제롬 카라반은 경찰의 검문 검색권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었다. 폭동이 끝난지 1년후에도 카라반 시장은 시민들이 폭력을 자제하고 평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20대였던 디트로이트 시의원 실라 카크럴(사진)은 그의 공약이 공허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폭동이 아니라 봉기였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그 봉기 이후에 첫 흑인 시장이 탄생했으며 그는 처음으로 경찰력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봉기가 끝난 후 백인들과 금융자본이 디트로이트에서 빠져나간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디트로이트에 사는 저소득층 흑인들은 1967년보다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

미대통령 자문위원회는 사건 조사를 마치고 디트로이트 봉기가 조직적인 인종차별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관리들은 이런 조사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디트로이트 폭동에 따른 오명을 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거는 숨길 수가 없다. 디트로이트 폭동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아직도 그에따른 결과물이 아직도 디트로이트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폭동이 발생한지 50년이 지난 이번주를 보내면서 디트로이트가 과거의 아픔을 씼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기 침체와 리더십 부족으로 파산가지 경험했던 디트로이트가 4년 전 마이크 더간이라는 백인을 시장으로 당선시키면서 환골탈퇴를 시도했었다. 4년이 지나면서 디트로이트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더간 시장은 디트로이트를 떠난 사람들과 자본을 다시 디트로이트로 유입시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포드 파운데이션과 나이트 파운데이션은 2년전부터 디트로이트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Detroit Journalism Cooperative(이하 DJC)를 결성하고 지원하고 있다. DJC는 Bridge 매거진, Detroit Public TV, Michigan Radio, New Michigan Media(주간미시간, 쥬이시 뉴스, 라티노 프레스, 미시간 크로니클, 아랍어메리칸 뉴스), WDET로 구성되어 있으며 디트로이트 폭동이 일어난 5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는 영문 기사를 작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DJC는 정치, 경찰, 빈곤, 인종차별, 교육, 사법 정의, 주택 등 8가지 주제를 통해 집중 취재활동을 벌여왔으며 해당 기사들은 공식 싸이트( http://www.detroitjournalism.org)에서 연람할 수 있다.

mkweekly@gmail.com

Leave a Reply

Discover more from Michigan Korean Weekly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