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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칼럼 –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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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절)

이 말씀을 이사야가 예언 할 즈음의 유다의 국제적인 입지는 지금의 한국의 상황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이다. 아람과 연합국이 호시탐탐 엿보고 있고, 거기다가 장차 앗수르의 침공까지 예견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하스왕과 백성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처럼 마음이 흔들거리고 있었다(사7:2)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까짓 것 별 것 아냐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야’(사7:4) 하신다. 아하스는 너무 두려워 하나님 앞에 입도 벌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구원의 징조가 바로 이 말씀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들이 받고 있는 생존의 위협과는 전혀 상관없는 처방을 하나님이 내리신다. 전쟁하고 임마누엘하고 무슨 역학관계가 있는가? 차라리 탱크나 비행기를 보내고 미사일과 자동소총을 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치나 경제 군사적인 문제에 얽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임마누엘’은 진짜 어이없는 대책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형편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유대를 강화한다거나 중국과 방위조약을 맺는다거나 일본과 경제협력을 더 공고히 갖는다던가 하는 일이 국가를 위해 실제적인 유익일 것이다. 아무런 실물적인 가치가 없는 임마누엘이 무슨 뾰족한 방도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풍전등화와 같은 유다에게 여전히 메시아의 약속이 건재함을 말씀하시고, 창세 이후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처녀가 아들을 낳는 사건으로 거기에 비해 인간들이 가진 문제는 조무래기 같은 일임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민족인데 아람이나 앗수르나 뭐 그리 대수냐 하시는 메시지를 보내신다. 그러나 이 처방을 받고 안심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어쩜 우리는 다 아하스와 같은 처지일 것이다. 미국 발 경제위기에다, 북핵 문제에다 그들의 도발적인 발언과 국내에서 그들과 내통하고 있는 좌파들의 세력, 독도문제로 인한 일본과 껄끄러운 관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식시장을 교란하고 있는 세계적인 검은 돈의 정체 등등 매우 힘에 겹다.

거기다가 중국이 우리의 무역시장의 앞마당이 되느냐 우리가 그들의 장터가 되느냐는 기 싸움도 뜨겁다. 이 어려운 시기에 성탄절이 다가 왔다. 수많은 성탄의 메시지가 날아다니고 있다. 인류에 평화를, 사랑을, 나눔을, 광명을, 희망을 염원하고 있지만 지금의 모든 국가나 국민들은 유다가 처한 암담한 전운에 쌓여 있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내년에는 더 어려운 고난의 행군이 예견되어, 정부나 기업은 지금부터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있다. 이때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리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신다면 과연 우리에게 위로가 될까? 힘이 될까? 인간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실제적인 것을 구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하나님과 흥정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주신다.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건지신다. 그리고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임마누엘’로 해결하신다. 이사야가 예언한 다음 700년 후에도 여전히 유다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겼다. 그 증거는 아람이나 앗수르는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유다는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까지 유다는 이 역사 속에 남아 있어야한다. 왜 임마누엘의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땅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에 나온 땅이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탄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난리가 났었고 큰 소동이 일어났었다.

장삿속으로 하던 참으로 하던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있음은 인류최고의 사건임에 분명한 증거이다. 그 동안 역사 속에 위대한 사건도 많았고 유명한 위인들이 무수히 많았어도 예수그리스도의 성탄의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성탄이 모든 것을 능가했고 이겼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그 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임마누엘인데, 그게 얼마나 센 사건이냐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행불행이나 형통이나 곤고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란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 하나님의 그 높고 깊으신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번 성탄에는 좀 더 성숙한 귀와 눈으로 ‘임마누엘이라’ 하신 그 분의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 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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