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인간관계를 고치는 길은 두 단계가 있다. 먼저 용서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성경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여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1-32)고 말씀한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용서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 중에 하나가 용서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용서해 주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
용서를 오해하지 말라
용서가 무엇인가? 오늘 사람들은 용서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사람들은 용서에 조건을 붙인다. 그러나 용서는 조건적 인 것이 아니다. 조건이 있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흥정이다. 성경은 용서는 무조건적이라고 말씀한다. 용서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사거나 흥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만일 …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흥정이지 용서가 아니다. 참된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요청하지 않아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 그때 예수님께 용서를 요청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흥정하거나 교환하지 않았다. 주님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용서를 과소평가 하고 있다. 용서는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나는 괜찮으니까 염려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통을 최소화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인정해야 한다. 상처를 피하기 보다는 직면해야 한다. 인간이 상처를 받을 때 보통 취하는 행동이 있다. 상처를 억누를 수 있다. 또 상처를 무시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직면하기 보다는 도피하려 한다. 연애시절이 아름다운 이유는 서로 대화를 했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 받고 있다’는 기쁨을 맛 볼 때 인간은 행복하다. 내가 고백하면 상대방은 마음을 열고 환대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는다. 진정한 마음을 나누지 않고 있다. 당신이 참으로 평안을 누리려면 먼저 자신과 상대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다.
잘못한 것과 상처를 받는 것은 차이가 있다. 당신은 용서와 용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은 자기의 아내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머리를 짧게 깍고 들어왔다. 이런 때는 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납이 필요하다. 용서는 다르다. 용서는 무거운 것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주었다. 그로 인해 당신은 심각하다. 바로 그때에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극소화하며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정말 심각한 것들을 위하여 용서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용서를 신뢰와 혼돈한다. 용서는 변화됨이 없이 인간 관계를 화해 시키는 것이 아니다. 용서와 신뢰는 다르다. 용서는 즉시 하지만 신뢰는 오랜 시간이 걸쳐 재건된다.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과 신뢰해 주는 것은 차이가 있다. 용서는 파괴된 것을 돌보는 것이고, 사람을 궁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관계가 옳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화해는 용서이상이다. 화해에는 세가지가 필요하다. 화해를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용서이다. 그러나 화해를 하려면 용서를 시작으로 다른 세가지가 일어나야 한다.
• 참된 참회를 나타내는 회개
• 장소와 때가 가능한 상환
• 신뢰를 구축함 – 신뢰를 구축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상처를 입거나 피해를 본 인간관계에 있어서 당신이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면 용서해주는 것은 당신의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회개와 회복이 일어나기 위해 다른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 남편이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아내는 즉각적으로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이 “이젠 집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당신은 더 나아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상담을 먼저 받으십시오. 그리고 술을 끊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렇게 용서가 은혜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신용은 벌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용서와 화해 그리고 신용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이해 때문에 인간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악 순환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당신에게 상처를 안겨준다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를 용서 해 주라고 하신다. 그러나 즉시로 그를 신뢰하고 모든 것이 정상인 것처럼 간주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잊는 것으로 생각 한다. 그러나 용서는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당신이 이 문제를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죄를 기억도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실상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당신이 잊으려 하면 더 생각이 난다. 무엇을 잊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무엇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는 말과 같다. 잊으려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잊혀지지 않게 된다. 잊으려고 노력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해결 방법은 잊으려고 하지 말고 극복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두뇌는 큰 창고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의 두뇌는 수천 억개의 서류철로 되어 있어서 실상은 아무것도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자라며 수많은 정보를 두뇌에 모으다가 14살이 되면 이제 필요 없는 정보의 문을 두뇌가 스스로 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을 닫아두는 것이지 실상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뇌를 열고 어떤 부분을 자극하면 잊혀졌던 생각들이 처음에 일어난 것처럼 전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다시 말하면 잊혀지는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게 되어 어떤 경지에 오르면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 죄의식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잊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 그것은 기억은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통해 당신을 어떻게 바꾸셨는지, 어떻게 나쁜 환경을 좋게 하셨는지, 당신의 성품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아주 중요한 시기에 당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잊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은 섭리에 대한 확신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잊는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어떻게 잊은 것을 생각해 내어 감사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기억하게 되면 감사드릴 수 있다. 감사는 과거에 받은 것을 기억하며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사건과 환경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 섭리는 당신을 결코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임을 믿으라.
사람들은 용서의 자격에 대해 혼돈하고 있다. 용서의 자격은 피해자에게 있다. 당신이 상처 받은 사람이 아니면 용서해주는 것은 당신의 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차세계 대전의 전범들을 모아놓고 “히틀러, 아이히만 그리고 여러분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람을 용서해 주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좋은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용서와 죄의 결과 제거해주는 것은 다르다. 어떤 사람이 잔인한 범죄를 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 그는 피해자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감옥에 있다. 왜? 죄의 결과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약에 중독된 어떤 여자가 아기를 낳았는데 신생아가 마약중독자로 태어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그 아기의 어머니가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녀는 즉시로 용서함을 받았지만 그 아기는 여전히 마약중독자로 남아있다. 참된 용서는 간단하게 죄를 집어 던져 버리고 즉시로 기분 좋게 느껴지는 그런 값싼 것이 아니다. 용서는 정말 심각한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이다.
손경구 목사 <인간관계와 영적성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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