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용서는 필요할 때까지 <1) 내가 하나님께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함 2) 복수하려는 권리를 포기함 3) 악을 선으로 대함>을 반복하는 것이다
용서는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당신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용서해 주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찌니라” (마 18:21-22)
이 말씀의 배경을 잘 이해하라.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아주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대의 율법에서는 세 번 용서하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것을 배가 한 후에 하나를 더 추가 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일곱 번 용서해주면 어떻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일흔 번에 일곱 번씩이면 어떠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일곱 번 곱하기 70번해서 490번 용서해 주라는 것인가? 아니다. 주된 관점은 영원히 용서해 주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 계속해서 용서해주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고통이 중단되고 복수하려는 욕망이 사라질 때까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이런 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용서합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오 분이 안 지나서 또 그 사람이 미워진다. 하는 짓을 보면 정말 미워죽겠다. 그때 또 용서를 반복한다. 또 용서해주는 것이다. 용서를 계속 반복하라. 이 말씀은 정말로 실용적이다. 왜? 자꾸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때에 다시 기도하라. “하나님 저는 그들을 다시 용서합니다.”라고 기도하라.
용서는 위대한 사랑의 얼굴이다. 내가 목회를 하며 상담해 왔던 대부분의 개인적인 문제들이 용서와 관련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용서를 체험하면 사실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자유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 용서를 해야 하는가? 왜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가? 거기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용서하라
주님은 매 순간마다 당신에게 은혜로우시다. 당신이 용서해줄 수 없다면 잠시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용서해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 이상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들보를 용서 받았다. 당신은 남의 티를 탓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너무도 큰 것을 탕감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할 찌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 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1-35)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해 주신 만큼 용서하라. 지금 잠깐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엇을 용서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해 주신 것 이상으로 용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실은 당신이 아무리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벽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신 용서였다. 어떤 불완전한 인간이 희생된 것이 아니다.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용서였다. 이 완벽한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 당신이 용서 받은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가장 큰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답게 은혜를 베푸는 존귀한 성도가 되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쓴 마음(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무익하다
의사들이나 과학자들이 증명한 인간의 가장 건전하지 못한 마음은 분노라고 한다. 분노,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분노는 타인을 상하게 하기 전에 자신을 삼켜버린다. 내가 초조해 하고, 안달하고, 복수를 생각하는 동안 실상은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다.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여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You’re only hurting yourself with your anger. (욥 18:4)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욥 5:2)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분을 낸다면 상대방뿐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먼저 애가 타고 분에 넘쳐 상처를 받게 된다. 화를 냄으로 교정되는 것은 없다. 화를 내면 더 나빠진다. 화가 과거를 지울 수도 없고 회복시킬 수도 없다. 화를 내면 자신만 불행해진다. 화를 내는 것을 즐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쓴 마음은 건강을 해친다. 모든 병은 식생활, 운동 그리고 스트레스와 관계되어 있다. 식생활과 운동의 경우, 한 순간 음식을 잘못 먹는 다거나, 하루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병이 되지 않는다. 장기적인 원인으로 병이 되는 것이 식생활과 운동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단기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 한번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사람이 넘어간다. 스트레스는 인체의 면역체계를 6배 떨어뜨린다고 한다. 쓴 마음은 건강을 해친다. 인간이 가지는 가장 비 건전한 감정 중에 하나가 분노다. 분노는 암을 만든다. 당신이 분노를 품으면 당신 안에 독이 뿌려지는 것과 같다.
죄의식과 분노는 육체에게 치명적인 건강문제를 일으킨다. 죄의식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불확신이고, 분노는 인간관계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분노는 감정적인 자살행위 이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에게 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라.
당신이 분노한다고 당신의 과거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분노는 현재의 문제도 절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분노는 좋은 것에 대해 무력하고 나쁜 것에 대해 유능하다. 분노는 절대로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하지 못한다. 실상은 당신을 항상 나쁘게 한다. 당신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 절대적으로 당신을 불행하게 한다. 쓴 마음은 역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녀이거나, 남편이거나, 아내이거나 지나가게 해야 한다.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신다. 당신은 순종하면 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2,35)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명령하신다. 어떤 사람이 아주 나쁜 습관이 있었다. 종이만 보면 찢는 것이다. 껌종이를 보아도 조각 조각 찢고, 메모지나 노트를 보아도 찢는다. 그는 이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의사들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회상시켜내고, 여러 가지 심리요법을 써보았지만 이 사람이 종이를 찢는 버릇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찾아왔다. 전후 사정을 다 들은 목사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이제부터 종이 찢지마!” 그 사람은 그때부터 종이를 찢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신다. 이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용서는 천국으로 가는 다리이다. 당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 다리를 태워 없애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것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 당신이 천국에 가려면 용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해줄 마음이 생기지 않아도 용서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쓴 마음은 아주 치명적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바로 그 사람을 닮게 된다. 당신이 반대하는 것들을 지나가게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남아있으면 닮게 된다. 같이 있으면 닮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쓴 마음을 빨리 지나가게 해야 한다.
“목사님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이것을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목사는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해하신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필요하다. 당신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필요하다. 일년에 한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에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아니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인간관계의 치명적인 문제는 용서하지 못함에서 온다. 이제 당신의 쓴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 주님은 당신을 용서해 주셨지 않는가? 그리고 주님은 당신이 이제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당신이 쓴 마음을 품고 살 때, 힘들게 사는 것을 아신다. 당신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용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기를 바란다.
손경구 목사 앤아버한인교회 담임목사 www.kcoa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