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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시대를 위한 이민자
  • 기사등록 2018-05-02 16: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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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성공적이고도 감동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있었다. 부정적인 견해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번에는 분명 다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물론 북미 정상 회담 결과를 지켜 봐야 하지만 북한을 중국의 영향권에서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미국이 놓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북한도 어차피 체제 보장과 제재 해제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니 그것이 확실히 보장된다면 핵무기를 고집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길게 말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므로 이 정도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와 예측을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은 것은, 한반도 평화 시대에 북한 재건을 위한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의 사명이다. 사실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미 오래 전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어야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긴장 관계에서 평화적 공존 관계가 되었을 때 미국의 한인들을 포함한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 한국에 있는 한국인보다는 해외에 있는 한인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 장로교 총회 파송과 중국 교회 협의회 초청으로 90년대에 4년 동안 중국에 선교사로 있었을 때, 중국 교포 목사님의 말이 기억난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온 한국인보다 미국이나 호주에서 온 한국인이 더 편합니다.”
그 이유는 다양성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외국에 살면서 부지불식 중에 다문화(multiculturalism)와 다원주의(pluralism)에 익숙해져 있다. 비록 한국 사회가 많이 다양 해졌으나 사회 전반적으로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육은 부족하다. 중국에 있을 때도 한국에서 온 분들은 늘 중국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더럽다”, “믿을 수 없다” 등등 모든 것을 한국 문화의 잣대로만 중국과 중국인을 평가했다. 물론 미국의 한인들도 타 문화, 인종, 민족에 대한 편견이 심각하지만, 그래도 다문화 사회에 살면서 무의식 중에 우리와 다른 것들과 더불어 살아온 경험 때문에 한국의 한국인보다 훨씬 더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해 관대하다.

성경을 봐도 바벨론 포로 후에 유대 땅을 재건한 사람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었다. 숫적으로는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황폐해진 유대 땅을 재건한 사람들은 외국에서 돌아 온 유대인들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버려질 “나쁜 무화과 나무”로 비유하고 있다(예레미야 24:8).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삼일운동도 사실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우리는 숲을 벗어나 숲 전체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반공 사상>이다. 중국에 있을 때 느낀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반공이 복음보다 한 단계 위의 가치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중국이나 중국 교회에 대한 불신과 편견이 많이 없어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빨간 색안경을 끼고 중국을 바라봤다. 당연히 모든 것이 빨갛게 보였을 것이다. 90년대 초 목사님들과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 터미널 벽에 빨간 글씨로 쓴 한자 앞에서 무슨 대단한 공산 슬로건인 줄 알고 함께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담배 피지 말라는 말이었다. 아직도 중국 교회가 어용 교회라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밤새도록 중국에서 제가 경험했던 중국 교회 이야기들을 들려 드릴 수 있다. 

반공으로 어릴 때부터 무장된 우리에게 공산국가와 교회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젠가 인민일보 영자 신문에 당시 중국 교회 협의회 회장이셨던 팅주교와 기자가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기자가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유물론주의를 말하는 공산주의 국가 안에서 유신론을 말하는 기독교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팅주교의 답을 요약하며 이랬다. “물론 출발점은 다릅니다. 그러나 결과로써 인민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구동존이(求同存異, 다른 것이 존재하는 가운데 공통점을 찾다)를 믿습니다.”

어떻게 공산국가에서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가? 저는 반대로 인간조차 상품화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 교회가 가능하다면, 공산주의 사회에도 가능하다. 직접 중국 교회도 경험했고, 쿠바 교회도 경험해 보았지만 공산사회에서도 기독교회는 가능하며,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들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중국 정부는 종교에 무관심했다. 종교를 탄압한다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중국의 근간이 되는 공산주의를 부정할 때, 둘째는 종교가 독립 운동과 연관될 때였다. 사실은 첫째보다 둘째 이유를 더 두려워 한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종교에 대해 솔직히 그들은 별 신경 안쓴다. 

북한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복음으로 공산주의를 궤멸시키겠다는 자세로는 북한을 재건할 수 없다. 남북이 전쟁이 아닌 대화를 통해, 정권 붕괴가 아닌 협력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듯이, 북한 선교나 북한 재건도 서로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낼 수 있다. 북한 지도자들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접근하는 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초대교회도 로마 정부를 대적하며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순종하라 가르쳤다. 어릴 때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는 반공 표어를 외우며 자랐다. 그런 우리가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으로 회심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제 때가 되었다. 에스더를 향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도전했던 모르드개(에스더 4:14)의 말을 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진다.



한명성 목사
플린트 유니티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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