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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념 특집 [주간미시간이 만난 사람] - 독립군의 후예 이천영씨, “어렵고 가난했지만 독립운동은 옳은 길이었다…
  • 기사등록 2015-08-12 10:42:34
  • 수정 2015-08-14 0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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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아버 거주 이천영씨(우)와 부인 한문실씨가 독립군으로 싸웠던 가족의 사진을 보고 있다.

[앤아버=주간미시간] 김택용 기자 =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다. 하지만 일본으로 부터 나라를 되찾은 그날의 감격은 세월이 지나면서 후손들에게는 희미해지고 있다. 특히 미국 이민 사회에서 광복절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기란 쉽지 않다. 한인회들이 주최하는 기념식과 교민 체육대회로 활용되고 있는 광복절이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이벤트성 행사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미시간 한인 사회에 생존하고 있는 독립투사의 후예 이천영씨를 앤아버에서 만났다.

이천영씨는 독립투사 이광 씨가 둔 5남 2녀중 넷째 아들이다. 54년 미국 미조리 대학에서 케미컬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한국으로 귀환해 한국 최초 비료공장에서 장치 산업 선두주자의 역할을 했던 그는 퇴직후 앤아버로 돌아와 정착했다.

이천영씨의 선친 이광 톡립투사
그의 선친인 이광 독립투사는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고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건너갔다. 이회영, 이동녕, 주진수, 장유순 등과 함께 만주에 간 그는 요녕성 유하현에 기지를 정한다. 1911년 봄에 독립기지를  설치, 군관 양성의 사업으로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경학사는 농사짓고 배워서 독립 국민의 자질을 갖추고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의미요, 신흥강습소는 조국 광복의 핵심 인물인 청년 군관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신흥무관 학교 교장직도 역임한 이광씨와 뜻을 같이 했던 임시 정부 인사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 이시영, 이회영, 엄항섭, 양소벽, 조성환, 김봉준 등이 있다. 

1918년 11월에는 국내에 잠입하여 양기탁, 전덕기, 최성모 등과 함께 일본에 저항하는 민중시위운동의 전개를 협의하였으며,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애국지사들은 상해로 집결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임시정부의 설립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년인 무오년에 기록된 대한 독립 선언서 (39인중에 이광씨가 포함되어 있다)

1921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조성환, 한세량과 함께 북경주재 특파원의 임무를 맡아 교민들의 거주권 확보와 생활안정 등, 교민의 생계를 보호하는데 전념했다.

1932년 9월에는 남경에 집결한 독립투사들과 한국광복진선을 조직하고 그 간부가 되어 홍진, 조완구, 조소앙, 현익철, 조경한, 엄항섭 등과 함께 선전활동에 전념했다.

1938년에는 장사에서 임시정부 호남성 외교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와세다 대학과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한 그는 당시 최고의 인텔리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중앙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월급 전액을 독립자금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만주에서 살던 당시 이천영씨는 독립투사 아버지 이광씨와 한국혁명여성동맹 간사였던 어머니 김수현 씨로부터 일본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하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1940년에 촬영된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식, 원내는 이천영씨의 어머니인 김수현 간사

후세들의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장준하 선생이 이천영씨의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을 매우 곧으시고 어린이들에게도 최선을 다해 공손하게 대해주시던 분으로 기억한다. 장준하 선생은 나라를 되찾으려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주일학교를 자진해서 만들었다.  

이천영씨는 70년 전 광복의 날을 기억한다. 한인들이 모여 살던 중국 토교에서 광복을 맞았는데 일본이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흥분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밤늦게까지 잠도 안자고 춤을 추며 기뻐하던 한인들은 기다란 폭죽을 사다가 작대기에 매달아 터뜨리며 동네가 떠나가도록 환호했다. 모두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한 사람만은 비통해 했다.  장안에 있는 미군 특공대에서 훈련받는 독립투사들을 시찰하고 토교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광복이 외부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개탄했다. 광복이 조금만 지연되었다면 광복군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광복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에서였다.

이광 투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10월 15일 임시정부 환국에 앞서 교포 보호를 위해 한교선무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의 중국 정부와의 연락 업무 및 교포 송환문제와 기타 처리할 일을 맡았다. 이에 따라 그는 김구 선생에 의해 화북 한교선무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중국 동북 일대에서 팔로군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는 교포들을 중국 정부 및 미군과 교섭하여 구출해 냈다. 전차양륙함에 한번에 5천명의 한인들을 태워 천진에서 인천까지 20번을 실어 나르며 약 1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자칫 발이 묶일 수 있었던 교포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 그의 임부였다.

이천영씨는 아버지인 이광씨가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사익보다는 공익을 앞세우셨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나라를 앞세웠다. 남들 같으면 자신의 가족들을 맨 처음 탈출시켰겠지만 그는 달랐다. 이광 투사는 자신의 가족들은 맨 마지막 배에 실었다. 이천영씨는 48년 8월 31일 마지막 배를 타고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던 일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방역을 하느라 텐트 속에서 10일간 대기해야 했는데 마침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날씨가 추워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추위도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을 얼리지는 못했다. 만주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이광 씨는 후일 충북도지사를 지냈으며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는다.  

이천영씨는 훈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세들에게 남겨준 아버지의 나라 사랑 정신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나라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조 말엽 평양 감사를 지냈던 아버지를 둔터라 당대 부호였던 이시영, 이회영(새정치연합 원내대표 이종걸 의원의 조부) 형제는 나라를 위해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를 임시정부에 바쳤으며 결국에 가족들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광복이 가능했다"라고 전했다. 

이천영 씨 가족도 독립을 위해 전 식구가 다 나섰다. 이천영씨의 큰 누나인 이국영씨는 직접 교재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형도 학생의 신분으로 훈련에 참가했다. 


이천영씨 누나인 이국영씨가 제작했던 학교 교재를 책으로 편찬했다.

이천영씨와 부인 한문실씨는 독립투사의 자녀로 살아온 세월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재물이 없고 가난해도 자랑스러웠다"고 말한 그들은 "힘들었지만 옳은 길이었기 때문에 당당했다"고 전한다. 고등 교육을 받은 인텔리 집안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친일파로 남으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옳은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천영씨는 중국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중국 아이들로부터 '망국노(나라를 잃은 노예)'라는 놀림을 받을 때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견디지 못해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라가 없다는 상실감에 늘 주눅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라가 더 중요했다. 가난하고 어렵지만 참고 견디어 독립군이 되기를 소원했었다.   

충북 도지사 재직시 공관에 모인 이광 독립 투사의 가족들

그는 후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며 일침을 놨다. "어떻게 되찾은 나란데 이러는지 가슴 아프다. 분열과 분쟁이 뒤덮인 형국이 안타깝다"고 말한 그는 "역사를 바로 안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분통해 했다. 선조들이 남북 분단과 남남 분열을 보자고 목숨을 내걸고 독립운동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역사를 소홀이 여기는 교육 제도도 못마땅하다. "이스라엘이 2천년 동안 방황했지만 성경을 통해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임시 정부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 이었다"고 말하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울로 삼았다"고 전했다. 나라를 되찾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시간 한인 사회에서도 한국의 역사와 정신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회가 그 역할까지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교회 목회자들이 역사의식을 갖고 후세들을 바르게 교육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이 없는 광복절 기념행사는 이무런 의미가 없다"고 역설했다. 

역사의 가치를 후세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해줄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동포 자녀들을 위해 영어로된 자료를 제작해서 배포할 필요가 있다.  영화나 인터넷을 통한 홍보물 제작도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선조들이 목숨을 바치며 되찾으려고 했던 조국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우리는 어떤 조국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후세들에게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열정일 것이다. 또 미국 땅에서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한국의 언어와 문화 및 역사를 가치있는 배울것으로 인식시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10일부터 사흘동안 파홀로 캠프장에서 열리고 있는 세종학교 주최 ‘세종 역사 문화캠프’가 그런 뜻에서 의미있는 행사로 다가온다. 올해로 3년째는 맞는 이 캠프는 역사 문화 교실, 전통문화 이해와 체험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행사가 열리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미시간 한인 동포사회에서 이렇게 훌륭한 프로그램이 준비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인데도 커뮤티니 전체에 알리는 것을 소홀히 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 재외동포재단에서 손님이 오고 총영사관에서 영사들이 방문해야 중요한 행사가 아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우리 동포 자녀들이 어떤 배움을 얻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후세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고마움을 반감시키는 홍보부족은 참으로 안타깝다.

또 매년 열리는 3.1절, 광복절 기념식이 점점 식상해지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행사에 참석을 해도 특별한 감동을 받기가 힘든 것은 매년 되풀이 되는 아이디어가 없는 행사 구성 때문이다. 

매년 똑같은 기념사에 아무런 감명이 없는 진부한 스피치, 시키니까 억지로 하는 만세 삼창, 그리고 시간을 메우기 위한(?) 체육대회가 전부다. 후세들이 참석을 해도 3.1절, 8.15 광복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골자를 배울 수 있는 스피치도 없고 자료도 없다. 

올해 맞는 70주년 광복절 기념식은 예년과 달라지기를 희망한다. 일상적인 기념식에 점심 먹고 운동이나 하고 헤어지는 진부한 행사에서 벗어나 광복의 의미와 나라의 중요성을 흠뻑 느끼는 교육적인 행사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mkweekl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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